이용수 할머니 안은 트럼프… 文대통령이 일깨운 ‘동맹의 조건’

입력 2017-11-08 15:07 수정 2017-11-09 17:38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포옹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청와대 국빈만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밀착해 포옹했다. 신장 188㎝의 거구인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 인사를 마치고 다가온 이 할머니 쪽으로 상채를 숙인 뒤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안았다. 포옹을 마치고 영부인 김정숙 여사에게 이동한 이 할머니의 어깨를 다독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의 행동 하나로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영화 ‘아이캔스피크’의 실존 인물

이 할머니는 지난 7일 밤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 초청을 받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이 할머니가 대만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던 시기는 16세였던 1944년. 일본군은 10대 중반이던 이 소녀도 예외 없이 성노예로 만들었다.

이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위안부 운영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미국 하원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2002년 2월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증언했다.

이 할머니와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1931년 9월 18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부터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자국과 침략국 여성에 성범죄를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이 미주‧유럽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미국 하원은 그해 7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과정은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아이캔스피크’를 통해 그려졌다. 배우 나문희가 연기한 주인공 나옥분 역의 실존인물이 바로 이 할머니다. 제작 배경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면서 이 영화는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청와대는 7일 국빈만찬에서 세 번째 코스 메뉴로 360년 씨간장 소스를 곁들인 한우 갈비구이, 독도 새우 잡채를 올린 송이돌솥밥 반상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와 미국 측 수행원들에게 선보였다. 청와대 제공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 참석해 임종석 비서실장과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건배사를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트집 잡는 ‘말로만 동맹’ 일본

일본은 이 할머니와 트럼프 대통령의 포옹을 놓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청와대가 국빈만찬에서 세 번째 코스 메뉴로 내놓은 독도 새우와 연결해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 트집을 잡아 비난했다. 독도 새우는 어종이 아닌 우리나라 최동단 영토 독도에서 수확한 새우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 격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다른 나라의 해외 요인 접대를 놓고 코멘트하지 않겠지만 왜 그랬는지 의문은 든다”며 “북한에 대한 대응에서 한·미·일의 연계 강화가 요구된다.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움직임은 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할머니와 트럼프 대통령의 포옹에 대해서는 “한·일 협정에 따라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양국 간에 확인했다. 이를 착실하게 실시하는 게 중요하다”며 “외교 루트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제시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거부하는 대표적 인물(이 할머니)이 초대됐다”며 “한국 정부가 역사 문제로 한·미·일 협력을 군사동맹으로 확대하기 어렵다는 뜻을 미국에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백악관 선임고문이 3일 도쿄 국제여성회의에서 나란히 섰다. 아베 총리는 여기서 이방카 고문에게 여성기금 57억엔 지원을 약속했다. AP뉴시스

文대통령이 보여준 ‘동맹의 조건’

반세기 넘어서까지 해결되지 않은 동아시아 역사 문제를 트럼프 대통령과 만찬 식탁에 올린 청와대의 구상은 일본 정부에 ‘동맹의 조건’을 일깨운 경고로 해석된다. 이 할머니와 독도 새우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협력해 대응하는 한‧미‧일 동맹에서 제국주의 시절 전쟁범죄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일본 정부의 사과를 선제적 조건으로 제시한 암시로 볼 수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3일 도쿄 국제여성회의에 참석해 여성기금을 조성 중인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백악관 선임고문에게 57억엔(557억원) 지원을 약속했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한‧일 협정에서 생색을 내며 내놓은 기금은 10억엔(97억원). 아베 총리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한‧일 동맹에 대한 태도는 기금의 규모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났다.

청와대는 국빈만찬에 초청한 이 할머니에 대해 “일본을 먼저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 대통령은 한‧일 간 역사 및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수밖에 없다”며 “위안부 문제를 균형 있게 봐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