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수줍게 건넨 인사. “안녕하세요.” 쌍꺼풀 없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배시시 웃으니 덩달아 미소가 번진다. “제가 첫 만남에는 낯을 좀 가리는데 두세 번 보면 괜찮아지거든요(웃음).” 아직은 낯설지만 왠지 더 알고 싶어지는 배우, 양승필(25)을 소개한다.
양승필은 지난달 말 종영한 KBS 1TV 일일드라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재한화교 5세인 다미기획 직원 손주영 역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엄마(이응경)와 함께 살기 위해 대만 유학도 포기하고 돌아온 주영은 빚에 쪼들리는 어려운 형편에도 꿋꿋하게 살아간다. 밝은 성품만큼은 실제 양승필과 꼭 닮았다.
5개월여간 한 몸으로 지내 온 주영과 헤어지기란 역시나 쉽지 않은 듯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승필은 “촬영장에서 내가 막내여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아했다. 거의 매일 만나던 선배들을 이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고 아쉽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초반에는 힘들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재미를 붙인 것 같아요. 호흡이 길었던 만큼 배운 것이 많아요. ‘처음에 너무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 빨리 지친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하면 오래 가져갈 수 있다.’ 선배들께서 해주신 조언에 정말 큰 도움을 얻었어요.”
특히 극 중 모자지간이었던 이응경과의 호흡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양승필은 “원래 우는 연기에 그리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응경 선배님을 마주보고 있으면 저절로 슬퍼지더라. 역할에 온전히 빠져들었던 거다. 배우간의 호흡과 교감에 대해 처음 배운 것 같다”고 뭉클해했다.
“처음 도전한 일일드라마였는데, 사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별로 없었어요. 제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웃음). 전체적인 연기 톤을 맞추는 데에만 집중했죠. 모니터하면서 감정 흐름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등장할 때마다 연기가 튀면 안 되니까요.”
앞서 출연한 드라마 ‘상속자들’(SBS·2013) ‘하녀들’(JTBC·2015)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그는 “어쩌다보니 미니시리즈와 사극, 일일까지 경험해보게 됐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장르가 주어지더라도 자신있다”고 웃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미국 유학을 갔다 고등학교 때 돌아온 양승필은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미국에 있을 때 Mnet에서 하는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 잠깐 왔을 때 모델 에이전시에 오디션을 봤는데 운 좋게 합격했죠.”
광고 촬영을 하면서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주는 매력을 느꼈다. 자신이 등장하는 영상물이 TV에서 방영될 때의 짜릿함은 덤이었다. 대학 진학을 고민하던 차에 연기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이후 건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본격적인 연기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이론 수업보다 현장에서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도와가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너무 좋았어요. 전임교수로 계셨던 홍상수 감독님께 시나리오를 쓰는 법에 대해 배우기도 했죠. ‘말을 하기 전에 글로 네 생각을 풀어라. 그럼 잡생각이 사라져 좋은 글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수많은 오디션에 떨어져도 봤다. ‘내 길이 맞나’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인 거예요. 오디션장에서 난 항상 긴장해있고, 역시나 또 떨어지고….” 하지만 꿈을 향한 열망을 놓을 순 없었다. 이런저런 영화를 찾아 보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렇게 다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쫄지 말고 당당하게 나를 보여주자.’
선배들의 도움 또한 그를 끌어준 원동력이었다. 특히 ‘상속자들’을 함께한 김우빈을 잊을 수 없다. “김우빈 선배님은 모델 일 할 때부터 여러 번 뵌 적이 있어요. 촬영장에서 절 알아보시고 다른 분들께 인사도 시켜주시더라고요. ‘화면에 나와야 하지 않느냐’며 뒤에서 몰래 손으로 끌어 위치를 잡아주시기도 하고. 정말 감사하죠.”
양승필은 현재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부모님 뜻에 따라 학업을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다는 게 본인의 솔직한 심정. 그는 “(인생을 결정짓기엔) 아직 이른 나이가 아닌가. 서른까지는 이대로 밀어붙여 볼 생각”이라고 했다.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너무 많아요. 뭐든 가리지 않고 차근차근 열심히 해나가려고요. 제가 영화를 진짜 좋아해서 스크린에도 꼭 도전해보고 싶어요. SF, 전쟁물을 특히 좋아해요. 공포물은 제가 좀 무서워하는데…. 아무튼 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습니다(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