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는 부자를 가장 부자답게 만드는 건 비싼 차나 명품 가방, 다이아반지 같은 게 아니라 ‘가난에 대한 무지’라고 쓴 적이 있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생각을 하며 자란 부자들은 애초부터 가난한 삶의 모습을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줄 몰랐다”고 말한 미국 힐튼 집안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나 버스요금을 묻는 질문에 “70원 하나요?”라고 답했던 국내 재벌처럼 진짜 부자들은 가난은커녕 평범한 사람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부자들만 가난이나 빈곤에 무지한 건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잘 모를 때가 많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지는 ‘빈곤 때리기’ 현상은 그런 보통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다. 빈곤 때리기란 가난을 토로하는 이들을 향해 “당신은 빈곤하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가난한데 왜 사치를 하느냐”고 비판하는 행태를 말한다. '가난은 이런 것이다' '가난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이상적 빈곤관'을 설정해놓고 거기서 벗어날 경우 그 대상을 비판하는 일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했다.
아사히신문의 인터넷 매체 위드뉴스는 1일(현지시간) 일본의 ‘빈곤 때리기’ 현상을 분석해 보도했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대학생 5명(아오이, 미유, 유타, 히카리, 메이. 모두 가명)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었다. 일본의 아동 빈곤율은 13.9%인데 이들이 자란 환경은 모두 ‘빈곤’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었다. 이 5명은 ‘이상적 빈곤’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입을 모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 얼마나 가난해야 정말 가난한가
‘이상적 빈곤'이란 어색한 말은 결국 "얼마나 가난해야 정말 가난한 것인가?"란 질문을 뜻한다. 이 질문에 5명은 “노숙자의 자녀” “옷이 찢어지거나 더럽고 초라한 모습” “배고파서 풀이나 종이를 뜯어 먹을 정도” “목욕하지 못해 더러운 것” “언뜻 봐도 ‘가난하네’ 하고 생각할 정도”라고 말했다. 즉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의식주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를 이들은 가난이라고 봤다.
하지만 이 5명의 모습은 그런 ‘이상적 빈곤’과 거리가 멀었다. 지극히 평범했다. 옷도 찢어지지 않았고 더러운 얼룩이 묻어 있지도 않았다. 히카리씨는 “요즘은 옷을 싸게 살 수 있다”며 “오히려 가난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눈에 띌 만큼 극빈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신속한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많다.
이에 학생들은 “극심하게 가난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아 지원이 부족하다”(미유) “생명 유지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있으면 ‘빈곤하지 않다’며 비난받게 될 것 같다”(유타) “게임을 하거나 연예인 포스터를 갖고 있는 것도 안 되겠지”(히카리) “외식이나 술자리를 하는 것도”(아오이)라고 말했다.
◇ 가난한데 왜 1만원짜리 점심을 먹어? 왜 스마트폰을 써?
지난해 NHK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빈곤계층으로 나온 고등학생은 빈곤 때리기를 당했다. 그가 1000엔(약 1만원)짜리 점심을 먹은 것, 집에 애니메이션 상품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미유씨는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땐 나도 밥값으로 1000엔은 쓰는 것 같다. 대신 혼자 있을 때는 아낀다”고 말했다. 아오이씨는 “친구가 밥 먹자고 권유할 때 ‘돈 없어서 못 가’라고 말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는다”고 했다.
히카리씨는 “지난해 ‘빈곤 때리기’를 보면서 ‘나도 콘서트에 갔는데 비난받으려나’ 하고 생각했다”며 “4000~5000엔(약 4~5만원) 가격이지만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선물로 받곤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방에도 포스터가 있긴 한데 잡지 부록으로 받은 것이라 비싼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타씨는 “얼핏 겉으로 보면 가난한 형편은 잘 보이지 않는다”며 “그걸 일일이 설명하면 ‘가난한 걸 어필하느냐’고 한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역시 사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쉬운 것 중 하나다. 대학생 5명은 모두 스마트폰을 갖고 있었다. 유타씨는 “인프라로서 스마트폰은 필수”라고 말했다.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타씨에겐 일하는 곳과 연락하기 위해서라도 스마트폰이 필수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의 스마트폰 소지율이 높다’는 데이터도 있다. 지난해 일본 시가현 히코네시는 지역 초등학교 5학년과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어린이용 휴대전화나 스마트폰 소지 여부”를 조사했다. 형편이 어려운 가구의 아이들이 “갖고 있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은 33.8%였다. 반면 다른 계층의 자녀들 중에는 “갖고 있지 않다”는 비율이 47.2%로 더 높았다.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아이들이 휴대전화를 더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형편이 어렵다’의 기준은 ‘지난 1년간 돈이 없어 생계에 필요한 음식이나 옷을 살 수 없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고 응답한 가구였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스마트폰은 긴급연락용으로 필요하다.
◇ ‘이상적 빈곤’ 상태가 아니어서 '때리기'에 당할까 두려운 사람들
이러한 이상적 빈곤관은 가난한 당사자에게도 깊숙이 침투하는 경향이 있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빈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미유씨는 “내가 빈곤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배고파서 풀을 뜯어먹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빈곤은 아프리카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미유씨는 부모의 이혼으로 어릴 적부터 어머니, 동생과 살았다. 모아둔 돈도 없이 어머니의 부족한 월급으로 3명이 살았다. 풀을 뜯어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100엔(약 1000원)짜리 막대 빵으로 아침과 점심을 때우곤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어린이 빈곤단체 행사에 참여해 빈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빈곤 상황'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는 극단적 빈곤에 처한 사람만 자신의 빈곤을 토로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누군가는 ‘힘들다’ ‘형편이 어렵다’고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속으로 억누르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히카리씨는 “굶어서 풀을 먹고 살 것 같은 극단적인 빈곤 이미지만 확산된다면 그 정도는 아니어도 생활이 어려운 ‘그레이 존’의 아이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