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 없는 개혁, 새롭게 또 새롭게!
잘못된 관행이 굳어지면 인습이 된다. 인습은 폐단을 낳고 이를 청산하지 않으면 쌓인다. 좋은 표상이라도 악습이 된 사례를 우리는 구약의 ‘구리 뱀’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을 퍼부었을 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들이 물려 죽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백성이 죄를 깨닫고 모세에게 간구했으며 모세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알려주신 해결책이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기.
그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었던 것이다(민 21:4~9). 한시적 해법으로서 제시한 구리 뱀이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영검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세월의 더께가 끼면서 맹신으로 변질된 것이다. 유다왕 히스기야가 개혁의 칼을 빼들었다. 그는 모세의 구리 뱀을 산산이 깨뜨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때까지도 느후스단이라고 부르는 그 구리 뱀에게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4)
서양미술사에서 흔치 않은 ‘히스기야의 개혁’과 관련된 그림이 16세기 프랑스에서 발행된 성경 안에 있다. 삽화를 제작한 이는 종교개혁과 신구 갈등의 격동기에 어디서도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피에르 에스크리히. 그는 아무 색채 없이 선 위주의 목판화에서 히스기야가 주도한 개혁이 어떠했는지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화면 오른쪽엔 왕관을 쓴 히스기야가 왼쪽 옆구리에 장검을 찬 상태로 오른손으로는 홀을 높이 들어 청산해야 할 구리 뱀을 가리키고 있다. 화면 왼쪽의 사람은 왕의 지시를 받고 구리 뱀을 장대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구리 뱀 제거는 히스기야 개혁의 하이라이트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바닥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파괴돼 있기 때문이다. 잘 보면 구리 뱀을 직시하는 이는 히스기야와 집행자 두 사람뿐이다. 다른 이들은 저어하며 수군대는 듯한 모습이다. 이는 개혁이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생각케 한다. 적폐를 청산할 때 다른 잣대와 궤변으로 딴지 거는 이들이 있음은 예나 오늘이나 여전하다. 그럴수록 더 명확한 기준으로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히스기야는 전통을 모두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상 다윗이 한 모든 것을 그대로 본받아,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왕하 18:3) 옛적 정신은 이어받되 잘못된 외피는 과감히 제거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몇 주년 기념행사로 그칠 일이 아니다. 권력지향, 금권선거, 성직세습, 불투명한 재정, 성추문 등. 바로 500년 전 그토록 질타했던 행태를 개혁의 후예라고 하는 이들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니! 교회의 정화가 사회의 정화를 가져오고 시민의식을 고양시키고 정치제도를 바꿔왔다는 것은 세계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안의 ‘느후스단’ 구리 뱀은 어떤 것일까. 깊이 생각할 일이다. 세간의 평가로는 외려 ‘구교’는 새로워지고 ‘신교’는 후패해지고 있다. 통회할 일이다. 신구를 떠나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도모하는 것이 기독교의 나아갈 길임은 자명하다. ‘개신교’는 ‘개혁’과 ‘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존립할 수 없다. 두 가지는 함께 가야 한다.
허나 모세도 다윗도 루터도 잘못과 흠결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자기갱신은 끊임없어야 한다. 낙심치 말고 전진해야 한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4:16). <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