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조심해"가 돼버린 "차 조심해"… 대서양 건넌 유럽식 '차량테러'

입력 2017-11-02 10:18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에서 발생한 차량 돌진 테러에 사용된 트럭. AP 뉴시스

불특정 다수, 무고한 시민, 무방비 행인을 공격하는 ‘차량 돌진 테러’는 최근 유럽에서 자행된 테러 공격의 전형이 됐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지난 8월 발생한 테러는 흰색 밴을 몰고 군중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7월 프랑스 휴양도시 니스에서 같은 형태의 테러가 처음 등장한 뒤 불과 1년 새 7차례나 발생했다. ‘소프트 타깃’을 겨냥한 ‘일상 속 테러’는 총과 폭탄이 동원된 과거의 수법보다 훨씬 악랄하다.

이 수법이 이제 북미로 전이됐다. 미국 뉴욕에서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배후로 추정되는 ‘트럭 돌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9명이 죽거나 다쳤다. 범인은 9·11 테러 현장으로부터 불과 500m 떨어진 곳에서 그동안 ‘유럽 스타일’이었던 차량 돌진을 감행했고, 대규모 인명피해와 공포를 유발했다. 중동에서 거점을 잃은 IS가 세계 주요 도시에서 추종자들을 더욱 부추겨 이 같은 소프트 테러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맨해튼 자전거도로 1400m 질주한 ‘테러 트럭’

31일(현지시간) 오후 3시쯤 뉴욕 맨해튼 남부(로어맨해튼)에서 흰색 소형 트럭이 강변 자전거 도로로 돌진해 8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이번 사건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뉴욕에서 벌어진 최악의 테러로 평가된다. 범행에 사용된 트럭에서 영어로 ‘IS의 이름으로 (범행을) 한다’고 적힌 쪽지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럭은 허드슨 리버 파크 앞에서 허드슨 강변 자전거도로를 덮친 뒤 자전거 운전자와 보행자를 잇달아 치며 약 1400m를 돌진했다. 차는 스타이브센트 고교 인근 교차로에 서 있던 스쿨버스와 충돌하고서야 멈췄다. 이곳은 9·11 테러로 무너졌다가 재건된 원 월드트레이드센터(1WTC)에서 북쪽으로 500여m 떨어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이날 저녁 귀신 복장을 하고 파티를 벌이는 핼러윈 행진이 예정돼 있었다.

트럭 운전자는 차에서 뛰어내린 뒤 총기 두 자루를 들고 쏘는 시늉을 하며 도주했다. 그는 아랍어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기도 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교차로를 가로지르던 용의자는 경찰이 쏜 실탄에 복부를 맞고 제압됐다. 그가 소지한 총은 공기총과 페인트볼 총이었다. 용의자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 중이다.

트럭 돌진 테러가 발생한 미국 맨해탠에서 경찰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테러 트럭과 충돌한 통학버스가 찌그러져 있는 모습. AP 뉴시스

현장에서는 6명이 즉사하고 2명이 병원 이송 중에 숨졌다. 사망자 중 5명은 고교 통합 30주년을 기념해 아르헨티나에서 뉴욕으로 여행을 온 관광객이었다. 같은 일행 중 6명은 부상을 입었다. 다른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은 벨기에인이다.

용의자는 29세 남성 세이풀로 하비불라에빅 사이포브(사진)로 확인됐다. 그는 2010년 우주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미국 오하이오주로 처음 넘어온 뒤 영주권을 받아 플로리다주 포트 마이어스와 뉴저지주 패터슨에서 생활했다. 패터슨은 뉴욕에서 북서쪽으로 19㎞쯤 떨어진 뉴저지주 북동부 도시다. 사이포브는 포트 마이어스에서 트럭운전사로, 패터슨으로 옮겨서는 우버 운전을 시작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 당일 밤 수사관들은 패터슨이 거주했던 곳으로 확인된 아파트를 압수수색했다. 우버 측은 사이포브가 회사의 경력 조회 절차를 통과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사이포브는 현재까지는 경미한 교통 위반 몇 건만 확인된 것으로 전해졌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사건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고한 시민을 표적으로 한, 매우 비겁한 테러 행위”라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병들고 정상이 아닌 인간이 공격한 것 같다”며 “중동 등지에서 물리친 IS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뉴욕 시민들은 “테러에 겁먹지 않겠다”면서 이날 밤 예정대로 핼러윈 행진을 벌이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지난 8월 바르셀로나에서 경찰이 차량 돌진 테러에 동원된 흰색 밴 차량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AP 뉴시스

◇ ‘니스의 충격’… 잇따른 모방 테러

차량 돌진 테러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온 것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대규모 폭력시위가 벌어졌고, 그 현장에서 제임스 앨릭스 필즈 주니어(20)가 승용차를 몰고 반대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3명이 숨지고 35명이 부상했다. 미국에선 인종주의 논란으로 이어졌지만, 이것은 명백히 무방비 군중을 겨냥한 ‘차량 돌진 테러’였다. 미국의 심장인 뉴욕에서 같은 수법의 테러가 벌어지며 이제 유럽식 테러 수법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땅에 완전히 발을 디뎠다.

시작은 프랑스 니스였다. 지난해 7월 14일 혁명기념일인 ‘바스티유의 날' 행사가 끝난 직후 흩어지는 군중을 향해 모하메드 라후에유 부렐이 트럭을 몰고 돌진했다. 무려 84명 목숨을 잃었고, 대다수는 그저 행사에 참가하고 돌아가던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부렐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IS에 동조하는 행적을 보여 왔다고 현지 검찰은 밝혔다. 미국 올랜도에서 벌어진 나이트클럽의 총기 난사 사건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기록도 나왔다. 테러를 준비하며 수법을 찾다가 차량 돌진이란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불과 5개월 뒤인 12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같은 수법의 테러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적재용량 19t 규모의 트럭이 사용됐다. 카이저 빌헬름 메모리얼 교회 인근의 크리스마스 시장으로 돌진해 휴일을 준비하던 시민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했다. 니스 테러와 닮은꼴이었다. 희생자들은 무고했다.

올해 3월에는 영국 런던 의사당 인근의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칼리드 마수드(52)가 승용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해 사람들을 친 뒤 흉기를 휘둘러 6명이 사망(범인 포함)하고 50명이 다쳤다. 용의자는 무장경찰이 쏜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고 흉기 공격을 당한 경찰관도 목숨을 잃었다.

다음 달에는 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꼽히는 북유럽이 차량 돌진 테러의 타깃이 됐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망명 신청이 거부된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39세 남성이 시내 중심가 드로트닝가탄에서 차량을 몰고 사람들에게 돌진했다. 5명이 숨졌다.

이렇게 잇따른 차량 돌진 테러의 특징 중 하나는 ‘IS의 개입’이다.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IS는 “우리가 저지른 일”이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바르셀로나 테러 역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IS가 선전매체인 아마크통신을 통해 배후임을 주장했다.

지난 6월 런던에서 다시 차량 테러가 발생했다. 3월과 아주 흡사했다. 런던브리지와 인근 버러마켓에서 발생한 차량 및 흉기 테러로 6명 사망하고 20여명이 다쳤다. 지난 9일에는 프랑스 파리 근교도시 르발루아-페레에서 순찰 중이던 군인들에게 차량이 돌진해 군인 6명이 부상했다.

◇ ‘로테크(low tech) 테러'… IS "차량 돌진" 선동

그리고 바르셀로나 테러가 벌어졌다. 1년 새 7차례. 서유럽에선 지난 1년간 두 달에 한 번 꼴로 차량이 사람들을 향해 돌진했다. 언제 어디서 유사한 공격이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대형 폭탄테러와 조금 다른 형태의,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공포가 유럽을 휘감고 있다.

바르셀로나 테러범은 밴 차량을 몰고 인파를 향해 돌진했다. 13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중상자가 많아 사망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총기나 폭탄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의심받을 염려도 없는 자동차를 이용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이런 수법은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에서 ‘로테크(low-tech) 테러’라고도 불린다. 불특정, 무방비 민간인을 겨냥하기에 전형적인 '소프트타깃 테러'이기도 하다.

주로 ‘외로운 늑대' 유형의 테러범이 이 수법을 사용해 왔다. 테러에 민감한 유럽 각국은 폭탄이나 총기 등의 규제와 감시 수위를 높여온 터였다. 이런 당국의 감시망을 피하는 방편으로 차량 테러에 착안했고, 니스 테러의 막대한 피해 규모로 ‘효과’가 확인되자 잇따라 모방하고 있는 상황이다. IS도 선전매체 '루미야' 등을 통해 외로운 늑대형 추종자들에게 차량 공격을 반복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