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지 않았다. 스스로를 앞세우지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했다. 연예계에서 하루를 멀다하고 불거지는 논란에 휘말린 적도 없었다. 원로 배우였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성장했다는 한때의 평가 정도가 유일한 논란거리였다. 이마저 묵묵하게, 십수년 간 천천히 성장하면서 이겨나갔다. 배우 김주혁 얘기다.
김주혁은 열광적인 팬덤을 가진 배우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조금 잘생긴 동네 형 같은 배역으로, 또 어느 날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뉴스 앵커 역으로 나타났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온화하고 느긋하게 보이는 표정, 침착하고 진지한 언변만큼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김주혁과 면식이 없는 연예계 인사가 빈소를 조문하고, 팬이 아니었던 사람들까지 깊이 슬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은은했던 잔상은 이렇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1. 배우 아버지를 둔 수의사 지망생
김주혁은 1972년 10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80~1990년대 영화‧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배우 김무생이다. 하지만 ‘고등학생 김주혁’은 영화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울 영동고에서 이과 계열을 선택해 수의사를 꿈꾸고 있었다.
진로는 어느 날 바뀌었다. 생전 평범했던 그의 삶처럼 진로 변경에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아버지를 통해 영감을 받았거나, 혹은 진로를 상담한 적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 역시 아들의 연기자 인생을 반대했다. 김주혁은 2005년 한 연예매체와 인터뷰에서 “어느 날 불현 듯 연기가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97년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SBS 공채 8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2. 튀지 않아도 보이는 은은함 ‘한국의 휴 그랜트’
김주혁은 1999~2000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단역으로 등장했다. 조교를 휘어잡는 ‘공대생 형’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곳은 영화계였다.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2003년 영화 ‘싱글즈’에서 주인공 장진영의 연인 수헌 역을 연기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영화에서 다소 귀티 나는 모습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듬해 개봉한 ‘홍반장’에선 마을주민을 부지런히 돕는 시골청년 홍두식 역으로 변신했다.
정장을 갖춰 입은 날카로운 모습도, 늘어진 면 티셔츠에 남방을 걸쳐 입은 수더분한 모습도 어울리는 배우였다. 하지만 어떤 차림새나 배역도 느긋하면서도 반듯하게, 귀티가 흐르지만 온화하게 보이는 김주혁의 인상을 망쳐놓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한국의 휴 그랜트’다. 휴 그랜트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영국 배우다.
해를 거듭할수록 출연작이 늘어났고, 어느 순간 아버지보다 유명한 배우로 성장했다. 영화계 원로인 아버지의 후광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김무생 김주혁 부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화면에 등장한 2005년 보험회사 광고는 두 배우의 대중적 인지도가 교차한 순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무생은 이 광고를 촬영할 당시 암 투병 중이었고, 그해 4월 16일 별세했다. 김주혁은 2013년부터 2년 동안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출연해 특유의 온화하고 침착한 성품을 대중에게 각인했다.
3. 갑작스러운 작별인사
김주혁은 지난 30일 오후 4시30분쯤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한 아파트 정문 인근에서 승용차 전복사고로 숨졌다. 그가 몰던 승용차는 다른 차량을 추돌한 뒤 아파트 벽면에 부딪쳐 뒤집혔다. 소방당국은 찌그러진 승용차 안에서 김주혁을 구조해 서울 광진구 건국대병원으로 후송,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의식은 되살릴 수 없었다. 김주혁은 같은 날 오후 6시30분쯤 사망했다.
운전 중 갑작스럽게 발생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의는 31일 김주혁의 직접적인 사인을 “즉사가 가능한 수준의 두부 손상”으로 지목했다.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 결과는 일주일 뒤 나올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케이블채널 tvN에서 8부작으로 방송된 드라마 ‘아르곤’은 생전 공개된 마지막 작품이 됐다. 김주혁은 이 드라마에서 방송 뉴스의 앵커 겸 탐사보도팀장을 연기했다. 그는 생전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를 참고해 연기했다”고 말했다. 손 앵커는 김주혁의 사망 당일 뉴스룸에서 부고를 전하면서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놓고 몇 번째 순서에, 얼만큼 보도해야 할까 고민해야 하는 착잡한 오늘”이라고 심경을 전했다.
영화계의 추모도 이어지고 있다. 국외에서는 영화 ‘러브레터’를 연출한 일본 영화의 거장 이와이 슌지 감독이 배우 김주혁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와이 감독은 31일 오전 10시41분 트위터에 “배우 김주혁씨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촬영현장에서의 그의 아름다운 연기가 떠올라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글로 적었다. 이와이 감독과 김주혁은 지난 2월 16일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선보인 디지털 단편영화 ‘장옥의 편지’를 합작했다.
김주혁의 빈소는 31일 오후 3시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월 2일. 장지는 충남 서산 대산읍의 가족 납골묘다.
국민일보 더피플피디아: 배우 김주혁
더피플피디아는 국민(The People)과 백과사전(Encyclopedia)을 합성한 말입니다. 문헌과 언론 보도, 또는 관련자의 말과 경험을 통해 확인한 내용을 백과사전처럼 자료로 축적하는 비정기 연재입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