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주혁은 10년 뒤 현업을 유지하면서 가정을 꾸려 초등학생 아이들을 돌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영화‧방송에서 연을 맺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옛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시간도 그가 그렸던 미래에 있었다.
김주혁은 이런 꿈을 2015년 7월 12일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말했다. 출연자들끼리 10년 뒤의 삶을 생각해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곧바로 낭독하는 자리였다.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해야 하는 예능프로그램의 특성상 유쾌한 표현들을 적어 넣었지만 평범하고 소박한 인생관을 편지에 담았다.
김주혁은 이 프로그램 출연진과 10년 뒤까지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런 희망사항을 밝혔다. 그는 10년 뒤를 가상한 이 편지의 첫 문장에 “어제 술자리를 갖고 오늘 10년 전 편지를 보려니 좀 어색하지? 그런데 좀 많이 늙었더라”고 적었다. 김주혁은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고, 출연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김주혁은 배우 차태현 아들의 서울대 입학을 축하했고, 김준호의 사업 성공을 기원했다. 데프콘에게는 추진력을, 정준영에게는 평범함을 주문했다. 동료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다정한 면모가 편지에 녹아들었다. 김준호는 “꼭 아버지 같다”고 했다.
김주혁은 결혼해 아이를 얻고 배우의 삶을 이어갈 꿈도 편지에 적었다. 그는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했다. 돈도 벌어야 하는데, 다행히 브래드 피트와 영화출연이 예정됐다. 돈 벌면 한 턱 내겠다”고 말했다. 웃음을 안길 목적으로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을 넣었지만, 아이와 동료를 사랑하는 그의 온화한 품성을 편지에서 엿볼 수 있었다.
김주혁은 지난 30일 오후 4시30분쯤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한 아파트 정문 인근에서 승용차 전복사고로 숨졌다. 그가 몰던 승용차는 다른 차량을 추돌한 뒤 아파트 벽면에 부딪쳐 뒤집혔다. 소방당국은 찌그러진 승용차 안에서 김주혁을 구조해 서울 광진구 건국대병원으로 후송,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의식은 되살릴 수 없었다. 김주혁은 같은 날 오후 6시30분쯤 사망했다.
김주혁이 운전 중 갑작스럽게 발생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의는 31일 직접적인 사인을 “즉사가 가능한 수준의 두부 손상”으로 지목했다.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한 검사 결과는 일주일 뒤 나올 것으로 보인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