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데 실패했다. 피해자들이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이를 한국 중국 등 9개국 단체들이 함께 기록물로 재구성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유네스코 최대 분담금 지급국이 된 ‘가해국’ 일본의 방해를 이겨내지 못했다.
31일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유네스코가 이날 공개한 신규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포함되지 않았다. 유네스코는 위안부 기록물과 일본 정부가 단독 신청한 ‘위안부와 일본군 군율에 관한 기록’(위안부가 합법이라는 내용을 담은 자료)을 심사해 ‘대화를 위해 등재 보류 권고’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해당사국 간 역사 인식이 다를 경우 심사를 보류한다는 유네스코의 내년도 제도 개혁안을 앞당겨 적용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압박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The 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는 지난 24일부터 나흘간 프랑스 파리에서 제13차 회의를 열고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가치를 심사한 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등재 여부를 최종 결정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앞서 중국이 2014년 6월 유네스코에 단독 신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곧바로 철회를 요구했지만 중국은 세부 자료 목록을 공개하며 맞섰다. 이에 유네스코는 중국이 함께 신청한 난징대학살 문건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으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다른 피해국과의 공동 등재를 권고하며 목록에서 뺐다.
중국은 곧바로 다른 나라와의 공조 의사를 내보이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재신청 의사를 밝혔다. 한국과 중국·일본·타이완·네덜란드·필리핀·인도네시아·동티모르 등 8개국 14개 단체로 구성된 국제연대위원회와 영국 런던 임페리얼 전쟁박물관은 위안부 관련 자료 2744건을 모아 ‘일본군 위안부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피해자들의 증언, 위안부 운영 사실을 증명할 사료와 위안부 피해자 조사 자료, 피해자 치료 기록, 피해자 지원 운동 자료 등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국내자료는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헌법재판소가 소장한 기록물 654건이 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심사소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에 대해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기록물”이라며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공개한 피해 당사자들의 용기와 이 증언을 접한 여러 국가의 시민들이 진상규명에 나서도록 이끈 점 등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또 각국이 합심해 거대한 공동 기억을 형성했다는 점도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분담금을 무기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0월 분담금 납부를 연기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 방해에 나섰다. 지난 5월에도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에서 이해 당사국 간 견해가 대립할 경우 사전협의를 권장하는 방안을 마련하자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분담금 납입을 보류했다.
일본 정부의 거센 저지 시도에 시달린 유네스코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보류했다. 일본의 강한 압박에 IAC와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정치적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은 최근 미국이 유네스코 탈퇴를 선언한 뒤 유네스코 최대 분담금 지급국가가 돼 이전보다 영향력이 더 세졌다.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반 탈퇴에 빌미를 줬다는 평가를 받은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으로선 임기를 보름 앞두고 최대 후원국이 된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때문에 뛰어난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개혁안이 시행되면 위안부 기록물을 놓고 일본과 다른 피해국이 협상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개혁안은 최장 4년간 대화를 독려하지만, 대화 결과를 판단할 주체나 조정자에 관한 세부 내용은 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추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