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기 자랑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교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랑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경계하고 있습니다.(고전 3:21, 시 12:3)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것들은 다 물거품들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랑하는 자의 어리석음에 대해, "자기의 선한 행실을 자랑하는 자는 마치 암탉이 알을 낳고 꼬꼬댁 꼬꼬댁 우는 것과 같다. 그러면 사람이 와서 그 알을 가져간다."고 비유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돈 자랑하면 결국이 도둑이 들것입니다.
10월 31일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습니다. 카톨릭이 성경에서 너무나 벗어나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성경으로!”를 외친 개혁교회, 오늘 기독교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500년전 교황청과 카톨릭교회, 그리고 사제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로마서 1:16-17이 과거 16세기에 종교개혁을 격발시킨 본문이었다면,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겸손한 개혁을 유발시키는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규모입니까? 숫자입니까?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런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사도 바울은 최고의 학문과 최고의 의회와 최고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써 무엇을 자랑할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라”입니다.
에스키모 인들이 늑대를 사냥할 때, 날카로운 칼날을 물에 담가 얼음을 만든 후에, 그 얼음에 피를 묻혀 늑대가 지나는 길에 던져둔답니다. 그러면 치명적인 피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늑대가 얼음을 핥다가 혀가 칼날에 닿으면 혀에서 피가 나오게 되는데 늑대는 그것이 자기 피 인줄 모르고 계속 핥다가 결국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일로 인하여 기뻐하거나 낙심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합시다. 진정한 자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 복음의 능력입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