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에도 한국 찾은 유커들 “쇼핑은 해야 하니까”

입력 2017-10-28 07:30

지난주 서울 명동 거리에서 만난 중국인 여성들은 ‘관광객’이었다. 일행 12명이 함께 서울에 왔다고 했다. 12명이면 가이드가 따라다니며 안내할 법한데, 이들은 그냥 몇 명씩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단체’에 버금가는 인원이지만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항공권과 숙소를 수소문해 개별 여행을 온 터였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자 두 여성이 숨도 쉬지 않고 외쳤다. “사드! 사드 때문에요!”

중국 정부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에도 한국에 온 유커들을 만나보려 찾아간 명동에서 1시간 넘게 두리번거렸지만 중국인 관광객과 함께 있는 가이드는 1명도 보이지 않았다. 부지런히 상점에 드나들고 노점을 구경하는 중국인은 하나같이 젊은이들이었다. ‘장’(25)과 ‘왕’(26)이라고 이름을 소개한 두 여성은 4박5일 일정으로 자유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 골목에서 한국 연예인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고르고 있었다.

- 한국엔 처음 왔나요?
“처음이에요.”
- 요즘 한국에 오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줄었는데.
“당연히 사드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과거에는 한국 여행 패키지 상품이 굉장히 다양해서 그걸로 한국 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사드 사태 이후 패키지들을 다 없애서 단체관광이 힘들어졌어요.”
- 그런데도 두 분이 한국에 온 이유는?
“쇼핑이요!”

두 사람은 ‘쇼핑’이란 말을 두세 번 반복했다.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을 대부분 쇼핑에 투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드 사태가 해결되지 않아도 한국에 또 올 생각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렇다”면서 “(한국에서의) 쇼핑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커플티를 입고 쇼핑을 하고 있던 중국인 ‘첸’(31)과 ‘후’(29)는 “내 주변의 중국사람들이 한국 여행을 미루고 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한국행 비행기와 호텔을 오래 전에 예매해둔 터라 계획대로 오게 됐다"고 한다. 이 커플 역시 주로 쇼핑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미리 블로그에서 찾아 계획했던 관광 일정도 부지런히 소화하는 중이었다. 첸은 “중국인들도 한국인만큼 사드 문제로 인한 한·중 관계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 중국 정부의 방침 때문에 실제로 한국 여행을 취소한 사람이 주변에 있습니까?
“강제적인 것은 없었지만 많은 여행사에서 패키지 상품을 취소하거나 환불해줘 계획된 여행을 취소한 지인이 많아요. 우리처럼 젊은 사람은 개인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어서 그런 경우가 적지만, 단체관광을 선호하는 계층에선 중국 내 분위기 탓에 한국 여행을 미루고 있어요.”

중국 관광객의 감소는 수치로 그 심각성을 보여준다. 중국 온라인 여행사 시트립(Ctrip)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1위에서 올해는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작년 중국 황금연휴 국경절 당시 중국인들에게 최고의 여행지였던 한국이 사드 배치와 관련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1년만에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 ‘유커의 귀환’ 분수령, 평창올림픽

이렇게 개별적으로 한국을 찾는 유커의 다수는 ‘쇼핑’을 위해 온 이들이다. 그럼에도 이달 초 중국 국경절 황금연휴에 국내 유통업계는 유커 특수를 누리지 못했다. 대신 일본의 면세점이 유커의 ‘싹쓸이 쇼핑’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일본 언론은 국경절 황금연휴를 맞은 중국 관광객들이 일본 면세점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고 보도하며 “과거 한국을 찾던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대형 여행사 관계자는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의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도 큰 인기를 끌면서 여행상품이 다양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중국 단체관광객 유치 전담 여행사는 총 161곳이다. 대부분이 개점휴업 상태이고 일부는 폐업하기도 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객의 1720만명 중 거의 절반인 806만명(46.8%)이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입국한 중국인 관광객은 287만3566명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48.8% 줄었다. 중국 정부가 한국 단체관광 상품을 전면 금지한 3월부터 8월까지만 보면 하락폭은 더욱 크다. 지난해 453만9657명에서 올해 171만7533명으로 무려 62.2%나 줄어든 것이다.

중국 관광객의 힘은 세계가 뼈 속 깊이 절감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83년에야 해외여행을 허용했다. 그것도 홍콩이나 마카오 같은 곳만 갈 수 있는 제한적 관광이었다.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이 시작된 때는 2004년. 10년이 채 안 돼 중국인 해외관광객은 연간 1억명을 돌파했다. 아시아개발은행은 2030년이면 해외여행에 나서는 중국인이 연간 11억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정부는 내년 2월에 개막하는 평창동계올림픽에 기대를 걸고 있다. 중국은 동계스포츠 강국이다.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이 늘어나고, 이를 계기로 한한령의 장벽도 한층 낮아질 수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선수단, 취재진, 관광객과 그들로 인해 발생할 숙박·관광 수요뿐 아니라 아시아 동계관광 허브로서의 위상 제고 등 부수효과까지 고려하면 올림픽은 터닝포인트가 되기에 충분한 이벤트다.

◇ 사드 갈등 ‘물밑협상’ 벌이는 한·중

하지만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한령’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국내 관광업계의 동계올림픽 특수는 ‘반짝 효과’에 그칠 것이란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중국 정부의 근본적인 입장 변화를 끌어내는 것만이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양국 정부의 사드 갈등 ‘타협’ 움직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는 26일 한·중 양국이 관계 정상화를 위해 사드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공동성명 내지 합의문 발표를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가급적 다음 달 10일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다자정상회의를 전후해 발표할 수 있도록 실무 협상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물밑 조율을 해왔으며 다음 주쯤 실무회담 개최 공식화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당초 한국 측은 한·중 정상회담을 먼저 열고 그 공동성명 문안을 통해 사드 문제를 해결하기 원했는데, 그러나 중국 측이 ‘사드를 철회하든가, 적어도 사드 배치로 중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문 대통령의 방중을 수용할 수 있다'며 정상회담 성사의 전제조건으로 합의문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태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