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 연극이야기】 49. 상실된 포용(包容)과 내면의 치유 ‘ 옥상 밭 고추는 왜’

입력 2017-10-25 10:03
기억의 소환 ‘옥상(屋上) 의 소유권’

초등학교 시절 비좁은 골목 틈으로 올려다보는 주택가 옥상은 타인이 침범 할 수 없는 보물창고였다. 옥상은 버려진 생활 고물들을 재 조립해가며 발명가 흉내도 내봤고 로봇도 만들어냈다. 널려진 빨래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향기였다. 고등학교 시절 옥상은 친구들 포용과 화해의 장소가 돼 주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내면의 상실과 박탈감을 추스르는 치유의 장소였다. 장우재 작 김광보 연출의 <옥상 밭 고추는 왜> 연극을 본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떠올려본 옥상풍경이다. 겹겹이 쌓인 기억을 소환 할수록 옥상은 경계가 없는 행복한 내면의 지대였다.

동네가 재개발되고 옥상도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옥상은 공동 환경이 아닌 소유권을 다투는 장소가 되었고, 놀이는 개인주거환경을 침해하는 공해가 되어버렸다. 고층아파트나 빌딩 옥상은 틈틈이 뉴스에 등장하는 차디찬 아스팔트가 되어가고 있다. 온기 있는 옥상 공기(空氣)가 그립다. 한국사회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높이고 비대한 도시화가 되면서 육중한 체구로 쏟아내는 공기는 혼탁해지고 탐욕과 욕망의 그늘은 강렬해 진다. 온기가 들지 않는 한국사회 골목이 많아질수록 옥상의 경계도 비좁아 진다. 희망의 온기는 비좁아진 동네의 틈으로 올라오기가 버겁고 힘겨울 뿐이다.

낡은 다세대 주택의 녹녹치 않는 삶의 힘겨움은 재개발로 희망을 품게 되고, 탐욕과 뒤틀린 욕망만이 숨을 내실수록 도덕과 윤리는 실종되고 진실로 둔갑한 정의는 모호함의 진심으로 허공으로 떠다닌다. 말이 난무하는 시대다. 익명성의 댓글과 말들의 난타전은 승부 없는 싸움의 연장선으로 치닫고, 인터넷을 통한 신상 털기는 공포와 상처로 얼룩지고 잔인함으로 되돌아온다. 소유주의 사랑을 받는 일부 반려견은 타인에게 공포가 됐다.

개인주의와 말의 폭력이 난무하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삶의 한 켠 에서는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정신은 몰락되고 침몰되어 있다. 그 틈으로 억척스럽게 살아가려는 인물들은 여전히 동시대 삶이다. 재개발, 언어폭력, 삶의 불균형, 소외와 가난, 비정규직과 일자리, 노동자, 집회문화, 신상 털기, SNS 소통과 댓글문화, 동원관제집회 등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특히, 240번 버스기사 사건은 사실 확인 없는 자극적 정보가 인터넷을 거치면서 33년간 성실하게 운전만을 해온 노년의 버스 기사 이야기는 악성 댓글이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까지 생각한 사건으로 지나칠 수 없는 현실이다.

작가가 공연책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을 끝까지 쓸 수 있도록 끌고 나간 원동력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라는 독일 여성 운동가의 말을 소설을 통해 읽고 나서 였다고 한다. 요즘 인터넷 발달로 개인 활동과 취향은 정치적 행동으로 비쳐지는 시대이고, 대중도 그런 소통을 과감하게 즐기는 문화가 됐다. 또한 소외와 분노로 치닫는 인간상실의 폭력들은 질서와 정치적인 통제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형성한다. <옥상 밭 고추는 왜> 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노출시키지는 않지만 현실사회를 향한 송곳 같은 대사들을 쏟아내고 그 소리는 강렬하게 들린다.

11년 만에 협동으로 <옥상 밭 고추는 왜> ‘현실텃밭’ 가꾸기에 나선 두 사람

11년 만에 두 사람이 협동으로 돌아왔다. <옥상 밭 고추는 왜>로 두 손을 잡은 장우재 작가, 김광보 연출 작품은 1994년도에 <지상으로부터 20미터>를 관람 후 23년 만에 공연을 보게 됐다. 이 작품이 김광보 연출의 대학로 데뷔 작품이다. 1995년에 극단 청우 창단 후 번역극 <에쿠우스>다이사트 역(염동헌) 로 소극장에서 강렬한 무대를 만들었고 조광화 작 <종로고양이>부터 김광보 연출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뙤약볕>,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인류 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그게 아닌데>, <줄리어스 시저> 등 수많은 창작극, 번역극을 섭렵하면서 대한민국 현대 연극연출가로 독자적인 연출세계를 구축했다. 2015년 서울시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으로 이동한 후에는 대중과 연극으로 더욱 소통하기 위해 <여우인간>, <나는 형제다>, <헨리4세>, <함익>, <왕위주장자들> 등 다양한 연극과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기획특별공연 등 다양한 연극을 생산해 내고 있다.

작가로 데뷔한 <지상으로부터 20미터> 이후 <여기가 집이다>, <미국 아버지>, <환도열차>, <햇빛샤워> 등을 직접 쓰고 연출하면서 두터운 평가를 받고 있는 장우재 작가는 이번 신작 초연 창작 작품인 <옥상 밭 고추는 왜> 에서도 전작 <햇빛샤워>에서 그려진 극중인물 광자의 소외된 삶과 죽음, 차갑고 매서운 현실에서 실종된 ‘관계’의 부재현상을 연장한다.

두 작품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관계의 본질을 들추어 낸 작품이다. 도시 한복판 거대한 맨홀은 광자 현실의 비참함을 뜨거운 온기로 품지 못하는 차가운 시선들이 공존하고 꿈틀거리며 한 줌의 희망도 모조리 빨아드리는 현실이다. 고단한 삶에서 쌓여진 치욕스러운 과거의 오염들을 걷어내기 위한 광자는 햇빛으로 샤워를 하며 오염된 내면의 자국들을 씻어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은 좌절과 아픔으로 뒤섞여져 진다. 죽음으로 내몰린 광자의 현실은 통로가 막혀있는 골목에서 선택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살인이다.

상실된 포용(包容)과 내면의 치유 ‘ 옥상 밭 고추는 왜’

진심과 진실, 포용과 화해, 도덕과 윤리, 정의가 실종된 현실 한복판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뒤틀린 인간의 욕망만이 숨을 내쉬고 그 오염의 골목에서 마주 할 수 있는 것은 폭력과 상처로 얼룩진 씻을 수 없는 내면들뿐이다. 이런 공기는 오염된 질서를 형성 한다. 옥상은 고단함과 상실을 회복하고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경계가 없는 공동 환경이자, 희망과 꿈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의 부재는 개인과 타자의 관계가 형성 될 수 없는 경계가 견고하게 세워진 죽음의 현실지대다. 작가는 사회의 이러한 부재현상을 연극적 삶으로 이동하면서 차디찬 현실바닥을 그려낸다. 이번<옥상 밭 고추는 왜> 작품은 두 사람이 오랜만에 각자 연출 활동을 하면서도 연극 데뷔 출발점의 영역인 작가와 연출로 돌아온 무대여서 화제가 됐다.

연극무대 옥상에서 소박하게 고추 텃밭을 가꾸고 홀로 살아가는 극중 인물 광자(문경희 분)인 정씨 할머니는 낡은 다세대 연립주택에서 살아간다. 연립주택은 소유권이 있는 개인 주거생활과 공동 주거환경이 교차되어 있는 생활환경이다. 다세대 연립주택 무대 건축물을 받치고 이있는 밑 둥은 낡은 재건축 아파트를 상징화 하듯 낡은 나무의자들을 겹겹이 쌓아 세월의 층을 이룬다. 이 연립에서 거주하는 광자 할머니의 유일한 낙(樂)은 옥상 한 켠에 고추 텃밭을 가꾸고 살아가는 것이다. 재건축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호에서 사는 현자(고수희 분)은 매일 옥상 고추를 싹쓸이 하다시피 따와서 연립주택 이웃들에게 인심 좋게 나눠 준다. 자식 같은 반려견을 키우며 부부 둘이 살아가는 현자에게 재개발은 한가락 남은 희망이다. 303호에는 배우 지망생 현태(이창훈 분) 가족이 산다.

현태는 배우가 진실과 진심의 내면으로 극중 인물의 삶을 살아가듯 광자할머니 죽음에 개입해 정의와 진실의 사과를 현자할머니한테 받고자 한다. 303호에 살아가는 고학력 실업자 동교(유성주 분)는 고학력 실업자고, 시간강사에서 정규직 교수를 꿈꾸는 지영(최나라 분)과 동교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동거한다. 지하 6호에서 살아가는 새벽청년 성식과 101호 남자는 극에 활력을 넣고, 극중 시위현장에 등장하는 모범운전사들은 공동체사회에서 지켜야 할 규칙과 질서를 환기 시킨다.

매일 사라져가는 광자 할머니 고추, 범인을 놓고 다가구 연립주택 골목은 시끄럽다. 온갖 추리가 난무하고 사소한 말 한 마디는 가슴을 도려낸다. 현자는 보란 듯이 옥상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정할머니(광자)와 마주하게 된다. ‘남의 텃밭에서 왜 고추를 따냐’고 따져 묻는 말에 현자는 말 폭탄을 쏟아내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다. 극은 죽음의 비밀이 밝혀지는 지점부터 현태와 동교를 중심으로 현자에게 사과받기 대작전이 펼쳐진다. 현자할머니의 신상 털기, 현태는 고추 캐릭터를 뒤집어쓰고 친구들과 합세해 연립주택 마당에서 현자를 향한 피켓 시위가 펼쳐지고 동네 모범운전사들도 합세한다. “그깟 고추가 뭐가 대단하다고 사과 하느냐”는 현자를 향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친다.

송곳 같은 현실풍경들이 풍자되고, 고추 캐릭터를 열고 나오는 현태 얼굴에 관객은 웃음을 터트린다. 험한 말을 뱉어내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온 현자의 삶을 내면 깊숙이 유지하며 절제된 감정으로 삶의 고단함을 한 올 한 올 무대로 벗겨내는 것은 배우 고수희다. 삶과 현실의 외연으로 꾹꾹 눌러 뱉어내고 쏟아내는 고수희 연기는 살갗을 파고든다. 그 감정이 파고들수록 옥상 밭 고추의 소유권 경계는 허물어지고 현자와 광자의 삶이 겹을 이룬다. 이번 연극은 작가 장우재가 다세대 주택 옥상에 청량고추 텃밭을 만들고 김광보 연출은 그 매콤한 씨앗을 받아 노련함으로 현실을 반사시켜내는 ‘김광보표’ 연극 텃밭으로 가꾸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잔인함은 공포를 넘어 무감각해진 현실을 투영하는 일상이 됐고 소외, 불균형, 적폐, 협치, 분노는 생활언어가 됐다. 삶의 분노는 괴물처럼 공격적으로 변신하고 있고 기형적인 사건을 생산해 내고 있다. 삶과 현실에서 겹겹이 자라나는 오염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시대의 옥상이 절박해지는 사회다. 비좁은 골목 틈 경계를 허물어 ‘진실 된 정의’를 품고 타자의 소외된 상실을 포용으로 감싸 안고 타인의 내면을 치유 할 수 있는 그런 옥상 같은 정의가 살아서 꿈틀대는 시대는 도덕과 윤리를 자율적으로 생산해 내고 사회를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화염의 분노를 전소할 수 있는 것은 소외 없는 삶의 균형이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관계다. 더불어 살아가는 경계와 각자 내면의 소유권으로 보장 받을 수 있는 옥상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시대의 옥상이 <옥상 밭 고추는 왜>를 보면 더 절실해 진다.

연극은 낡고 허름한 다세대 연립 주택과 옥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배경으로 공동화된 주택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김광보 연출은 오늘의 현실로 투영되는 삶을 넘치지 않게 섬세하게 쫒는다. 때로는 무대로 투영되는 살아가는 현실의 삶과 풍경들을 과장되지 않게 바라보고, 때로는 연극적인 환유를 통해 현실의 경계를 연극적인 삶으로 치환하거나 극적장면과 상황을 유연하게 끌고 가면서 연극적인 장치와 환기로 현실의 폐달을 밟고 작품을 종점까지 끌고 가는 김광보의 노련함과 현실을 강타하는 작가의 우회적인 솜씨가 돋보인다. 꼭 볼만한 연극이다. 10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옥상 밭 고추는 왜>를 볼 수 있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공연예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