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변호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 김세윤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사의를 밝히고 퇴장하려는 박근혜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의 유영하 변호사를 불러 세웠다. 변호인 없이 공판을 진행할 수 없는 형사소송법을 설명하고 사임 재고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를 향한 불신과 유감을 표한 박 전 대통령과 변호인단에 대한 ‘재판부의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는 16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80차 공판에서 “변호인단이 사임 신고서를 제출했다. (피고인인 박 전 대통령이) 구속 중인 만큼 변론이 필요한 사건”이라며 “변호인이 없으면 공판을 진행할 수 없도록 법이 규정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구속기간을 최대 6개월로 연장한 재판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재판부는 “외적인 고려 없이 구속 사유를 심리해 추가 영장 발부를 결정했다. 피고인에 대해 유죄를 예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라며 “국민적 관심이 있는 중요 사안이고, 방어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신속하게 재판해 실체 밝히는 게 국민 앞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지금까지(그랬고), 앞으로도 피고인의 공소사실에 대해 예단하지 않고 헌법과 법률에 의해 공정하게 진행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백지상태에서 심리한 뒤 판단하기 위해, 앞서 기소된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재발부해 선고기일을 미룬 상태”라며 “(변호인단은) 지금까지 심리를 진행해 사건 내용이나 진행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변호인단 사임으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피고인에게 돌아가고, 실체 규명도 상당기간 지체될 수밖에 없다. 사임 여부를 신중하게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 시한은 당초 이날 자정까지였다. 롯데‧SK그룹 뇌물 관련 혐의를 포함한 구속영장이 지난 13일 추가 발부되면서 박 전 대통령은 1심 선고공판 전까지 최대 6개월 동안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다. 박 전 대통령과 유 변호사는 이날 법정에서 재판부를 향해 강한 유감을 표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못했던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나는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다”며 “변호인단이 오늘 사임 의사를 밝혔다.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헌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공판에서 즉답을 피하거나 짧게 답했던 박 전 대통령이 이날만큼은 작심한 듯 발언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했다.
피고인석에 동석한 유 변호사는 “모든 역사가 기록되고, 후세가 이를 평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할 때”라며 “재판부의 구속영장 추가 발부는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사법 역사에서 치욕적인 ‘흑역사’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며 다소 강한 어조로 재판부를 비난했다. ‘흑역사’는 ‘수치스러운 역사’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인터넷 조어다.
유 변호사는 “오늘자로 변호인에서 사임하니 퇴정하겠다”며 법정을 떠나려 했다. 재판부는 그를 불러 세우고 증인신문 철회 등 공판 절차를 확인한 뒤 변호를 포기할 경우 그 피해가 박 전 대통령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또는 국선으로 (변호인을) 선임해 공판을 진행해야 한다. 새로운 변호인단이 10만 쪽 이상의 수사기록과 진행 상황을 검토해야 하는 만큼 심리가 상당기간 지연될 것”이라며 “이 경우 미결 구금 일수가 증가해 피해는 피고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된다. 사임 여부를 신중하게 재고할 것을 요청드리겠다”고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