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쌉씨부리하거나 달달하거나’

입력 2017-10-13 15:30
벼가 익어가는 가을 들녘은 초록색도 아니고 노랑색도 아닌, 또 다른 색이다.


쌉씨부리하거나 달달하거나

어느 주일 아침에 할머니 집사님이 나물반찬을 무쳐왔습니다. 반찬통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물반찬인데 맛이 좀 쌉씨부리해요.” ‘(맛이) 쓰다’는 형용사는 쓴 맛의 정도에 따라 ‘씁쓸하다’ ‘쌉쌀하다’ ‘쌉싸래하다’ ‘씁쓰름하다’ ‘쌉쏘롬하다’ 등으로 변용해서 쓰기도 합니다. 모두 같은 감각을 뜻하지만 표현하는 말의 어감에 따라 쓴 맛의 정도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형태의 형용사는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큰 특징입니다. 이것과 저것의 중앙값 혹은 정도의 상태나 감각을 표현하는 용언이 우리말에는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의 대비와 봄과 가을에 나타나는 계절의 미세한 촉감들이 우리의 언어와 정신세계를 화려하게 수놓은 탓이겠지요. 형용사는 논리가 아니라 감각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이것과 저것, 참과 거짓 등과 같이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직선적인 논리와 차원을 초월합니다.

이 세상은 ‘A는 B다(A=B)’와 같은 단순한 논리로 규정될 수 없는, 다중의(multiple)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학적 명징성과 직선논리로 이 세상을 이해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이것은 근대교육이 우리에게 선물한 획일성입니다.
근대성의 이러한 문제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예술입니다. 특히 시(詩)는 문자언어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전위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그의 시 ‘향수’에서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이라고 표현하여 석양 무렵의 사그라지는 햇살의 기세와 강렬한 황금빛 색채를 대비시켜 소 울음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농촌마을(자연)의 여유롭고 한가로운 시간을 포착해 냅니다. 비논리적인 언어로 한 폭의 그림을 아름답게 그립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마음이 담기게 됩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화가의 해석이 바로 그림입니다. 사진이 사물의 이미지를 모사한다면 그림은 사물에 투사된 사람의 마음을 그립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사진이 흉내낼 수 없는,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자들의 머리 뒤에 빛나는 원형, 그것을 그는 아우라(Aura)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빛, 이성(理性)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빛은 사람의 인식체계를 초월합니다.
세계는 이성의 논리체계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편만해 있습니다. 하지만 모순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논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역설(paradox)라고 합니다. 역설은 비논리적이지만 논리를 초월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의 논리체계를 넘어서 역설적으로 존재하고 역사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주적인 하나님의 역설을 이성의 그물로 포획하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자연과학의 언어로 규정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를 종이컵에 통째로 담으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세상은 쓰거나 달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쌉씨부리하거나 달달하거나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역설을 알아야 합니다. 역설은 하나님과 우주를 보는 눈입니다.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