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륵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상영관에 어느 순간 훌쩍임이 번진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지닌 진심은 그렇게 관객 마음에 고스란히 가닿았다. 쓰라린 역사를 살뜰히 어루만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품어낸 작품. 김현석(45) 감독 특유의 화법이 따사롭게 어우러졌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휴먼 코미디 장르로 풀어낸 수작이다. 위안부 피해자란 사실을 숨기고 수선 집을 운영하며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나옥분(나문희) 할머니가 이 영화의 주인공. 남다른 오지랖으로 구청에 수시로 민원을 넣던 그가 구청 직원 민제(이제훈)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서로 친구 혹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이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통과의 발판이 된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극 후반부 옥분이 민제에게 배운 영어로 청문회 증언에 나서는 장면은 관객에게 뜨거운 울림을 준다.
‘귀향’(감독 조정래·2016) ‘눈길’(감독 이나정·2017) 등 기존 위안부 소재의 영화들이 정공법을 택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한층 성숙한 방식을 보여준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아픔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현재의 문제로 가져온다. 이토록 유의미한 도전을 완수해낸 김현석 감독을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일반적인 위안부 영화와 결을 달리 한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저 또한 그런 이유에서 이 시나리오가 좋았어요.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죠. 우리 모두 위안부 역사를 피상적으로는 알지만 깊이 파고들어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거예요. 우리 영화는 피해자가 주체적으로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거든요.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때로는 돌려서 얘기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방식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나문희 배우의 존재감이 빛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힘인 듯하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부터 나옥분 그 자체였어요. 나문희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제작됐죠. 웃음과 감동, 양극단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분이 나문희 선생님 말고 또 계실까 싶었어요. 가만히 있는데도 (보는 이를) 왠지 슬퍼지게 만드는 힘이 있으시잖아요.”
-현장에서 직접 나문희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며 놀라운 순간이 많았을 것 같은데.
“나문희 선생님은 완성형 배우이시죠. 특히 어머니 산소에 찾아가 독백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덤덤하게 가다가 터뜨리시잖아요. 시작부터 오열하는 건 쉬운 버전이거든요. 나문희 선생님은 신을 자기 리듬으로 끌고 가세요. 서서히 연기를 끌어내시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전율을 느꼈어요. 청문회 장면을 준비하면서는 미국으로 미리 건너가 뉴욕에 사시는 따님과 함께 영어 연습을 계속 하셨대요. 영어 대사에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절대 감정을 안 놓치고 연기하시더라고요. 감탄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청문회 장면은 실제 미 의회에서 촬영돼 그 감정이 더욱 실감나게 전해진 것 같다.
“예산이 크지 않았어요. 순 제작비가 40억원을 안 넘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마지막 청문회를 위해 달려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현지 촬영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에서 찍으면 비용은 줄일 수 있을지언정 제대로 흉내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현지 프로덕션이 정말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와서 다행이에요. 현지 캐스팅한 배우들도 훌륭했고요. 특히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미첼 할머니를 연기한 마티 테리 배우가 굉장했죠. 그 분 때문에 나문희 선생님이 처음으로 긴장을 하셨어요(웃음).”
-청문회장에서 이제훈 배우가 ‘하우 아 유(How are you)’ 외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당시 이제훈 배우가 ‘박열’ 촬영 때문에 하루 늦게 도착했는데, 본 촬영 전날 반바지 차림으로 와서 그 대사만 쳐줬거든요. 그걸 듣는 순간 정말 찌릿하더라고요. 사실 시나리오 봤을 때 제 마음을 움직였던 지점이 바로 거기였어요. (이)제훈씨도 마찬가지였고요. 옥분과 민제의 교감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라 너무 좋았죠.”
-이제훈은 작품 전체를 생각하는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연기력도 워낙 출중하고.
“제훈씨가 요새 개념 배우가 돼버렸던데요(웃음). 일제강점의 역사를 다룬 작품에 연달아 출연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많은 남자영화 가운데서도 소신 있게 작품을 고르잖아요. 연기적으로도 큰 그림을 보면서 튀지 않게 작품에 녹아들어요. 요즘 젊은 배우들을 보면 생활연기를 표방한 애드리브나 개인기 같은 얕은 수로 뭘 해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제훈씨는 그런 걸 안 해요. 클래식하죠. 본인만의 ‘로직’을 짜놓고 전체를 그려나가요. 본인이 맡은 역할에 대해 연출자보다도 더 철저한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감탄했어요.”
-우회적인 화법을 택했을지라도 역사적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에 부담이 따랐을 듯한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스카우트’(2007)를 해봤기 때문에 진짜 자신 있었어요. 근데 위안부 역사를 더 깊이 알아가면서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위안부는 독도와는 또 다른 성격의 문제인 것 같아요. 인권의 문제거든요.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가슴 아리고 슬픈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코미디 형식을 취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피해자들의 진짜 얘기를 담아보자는 생각으로 확신을 가지고 밀어 붙였죠.”
-초반 코미디와 후반 드라마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제가 하는 코미디는 약간 호흡이 달라요. 타이밍이 반 박자 늦고 썰렁하기도 하죠. 기존 시나리오에서는 좀 더 일차원적인 코미디였는데, 제 취향이랑 맞지 않아서 조금씩 톤을 수정했어요. 제 식대로 바꾸고 보니 아주 왁자지껄하지 않은 코미디가 되더라고요(웃음). 일부러 톤 다운한 느낌도 들고요. 그게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아직까지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일본에 일침을 가하는 자막을 엔딩 크레딧에 실었는데.
“담백하게 끝낼까 생각도 해봤는데, HR121이 채택된 지 딱 10년 되는 해이더라고요. 우리로썬 굉장히 소중한 성취였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결의안이었기에 일본은 무시해버렸죠. 우리나라 정부가 후속 조치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어리바리했죠. 그것도 부족해서 8년 뒤 위안부 합의까지 해버리고…. 안 짚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감독님의 작품들에선 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이른바 ‘알탕 영화’라 불리는 남자영화가 판 치는 영화계에서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웃음과 감동, 이런 말은 쑥스럽고요. 기본적으로 ‘윤리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 같긴 해요. 세상을 보는 따뜻한 눈을 가지되, 그 따뜻함을 강요하진 말자는 생각이에요. 알탕 영화를 찍지 않는 건, 굳이 의도한 거라기보다, 그냥 제가 그런 영화를 안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맞는 걸 하다 보니까.”
-그런 측면에서 ‘아이 캔 스피크’라는 작품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2~3년 사이 남자영화들이 많이 나오는 추세였잖아요. 다양성 측면에서 우리 영화처럼 여배우들이 중심인 작품에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해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여서 더 반가우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인들에게 정말 아픈 상처를 다루고 있지만, 돌려 말함으로써 더 깊게 울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