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부모의 상처 대물림

입력 2017-09-27 09:28
이호분 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자식을 낳으면 “내 어린 시절의 아픔을 아이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않아” 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각오가 제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 그럴까? 


M은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아이다. 또래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눈치도 없는 아이였다. 혼자 놀고 공상하거나 책만 읽으려고 했다. 한번 책에 빠져들면 수업 시간에도 몰래 그 책에 몰두했다. 이런 문제로 모 상담소에서 엄마와 함께 치료가 필요하다며 본 병원에 의뢰한 아이였다. 

M의 엄마 역시 늘 대인관계에서 불안을 경험하며 살았다. 상대방을 너무 의식했고, 상대의 반응에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다 보니 피해의식이 생겼다.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말의 두서가 없어졌다. 

M의 엄마는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가 하나 있었으므로 할머니는 아들을 원하였고 M의 엄마는 부모의 원치 않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첫째와는 표가 날 정도로 둘째딸을 차갑게 대했다. 그러다가 외가에 맡겨져 2∼3년 산 적도 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주워온 자식 같은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지만 동기 간에도 어색하고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자신을 못 마땅해하는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인정받아 보려고 애를 쓰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리 열심히 하더니 겨우 이 정도냐?”는 식의 핀잔만 들어야 했다. 

그녀의 가슴 속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쌓여갔다. M의 엄마가 결혼해 M를 낳았을 때 친정어머니와는 다른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산만하고,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며 눈치를 자꾸 보는 M에게서 그녀는 자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는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가끔씩 분노 폭발하게 되고, 그 때마다 아이의 소심함과 산만함은 더욱 속으로 깊어만 갔다. 

자신의 분노가 억압된 채로, 그래서 분노의 대상과 화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머리로만’ 다르게 살려고 노력할 때 실패한다. 자신과 아이의 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자신을 투영시키기 때문에 머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M의 엄마는 권유에 따라 자신이 먼저 심리치료를 받았다. 차츰 아이에 대한 분노 폭발에는 자신에 대한, 자기 친정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투사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엄마는 차츰 대인 불안에서도 해방됐다. 아이도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호분(연세누리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