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실장이 걱정한 ‘우발적 충돌’… 北도 “조심하라” 지시

입력 2017-09-27 09:17

북한군이 비무장지대(DMZ) 인근 군부대에 남측과의 ‘우발적 충돌’을 자제토록 지시하며 긴장 상태를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주 독일 언론 인터뷰에서 ‘하급 지휘선의 오해로 인한 긴장 고조’를 우려했던 것처럼 북한도 예상치 못한 군사적 충돌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군 수뇌부도 이처럼 청와대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분석은 26일 국가정보원의 국회 보고를 통해 공개됐다.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움직임에 대해 “북한이 (관련 군부대에) 선(先)보고 후(後)조치 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다”며 “우발적 도발이나 충돌이 없도록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고했다. 이철우 정보위원장은 국정원 보고 내용을 전하며 “남북, 북미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시가 내려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정의용 실장도 우려했던 ‘우발적 충돌’

정 실장은 지난주 슈피겔 인터뷰에서 “군사적으로 하급 지휘선에서 오해가 발생하면 긴장이 갑자기 고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는 북한과 대화채널이 없다. 판문점에서 핸드마이크나 육성으로 간단한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며 ‘단절 상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발언이 나왔다.

남북 간 통신채널은 박근혜정부 시절 모두 단절됐다. 남북연락사무소, 적십자연락사무소, 군 통신선 등 세 종류 유선 통신망은 북한이 지난해 2월 박근혜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에 대한 보복 조치로 단절을 통보한 뒤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 북한에 의사를 전달하려면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우리 측 연락관이 군정위 관계자와 함께 MDL 근처에서 의견을 전달하면 북측 인사가 나와 수첩에 받아 적거나 캠코더로 찍어 상부에 보고한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됐을 때 상대방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일이 발생하면 국지전이나 전면전이 벌어질 위험이 크다. 2002년과 2003년 남북이 서해와 동해에 군 통신선을 개설한 것도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문재인정부가 지난 7월 남북적십자회담과 군사회담을 북한에 제안하면서 “판문점 적십자 연락사무소와 군 통신선으로 회신하라”고 요구한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정 실장은 대화채널이 단절된 상황에서 최전방 일선 부대 사이에 ‘오해’로 인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신속히 진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그는 “한·미·일은 2차 한국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막을 것”이라면서 ‘2차 한국전쟁’이란 표현까지 사용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 일선 부대에 ‘독자행동 자제령’ 내린 北

북한군이 일선 부대에 하달한 ‘선보고 후조치’ 지시는 DMZ에서 군사 대치 상황 등이 발생할 경우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일선 지휘관이 무력 사용의 필요성을 인식하더라도 반드시 상급 부대에 먼저 보고해 판단을 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쟁 억제’라는 목적보다 ‘돌발 변수’를 최소화하겠다는 수뇌부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하다.

핵·미사일 개발이 완성 단계에 이를수록 북한이 원하는 ‘미국과의 거래’ 시점도 다가온다. 김정은 정권은 핵을 통해 얻어내려는 목표와 그것을 위한 협상의 과정을 미리 설정해놓고 있을 게 분명하다. 북한이 지난 몇 달간 단계적으로 긴장 수위를 높이면서도 당장 무력충돌로 확대되지는 않도록 세밀한 계산 아래 도발을 이어왔다. ‘괌 포위사격’을 공언해놓고 괌과 다른 방향으로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식이었다.

일선 부대에 내려진 ‘선보고’ 지시는 예상치 못한 국지적 충돌이나 갑작스러운 군사적 자극이 이 ‘시나리오’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벼랑 끝 전술을 통한 치킨게임의 모든 과정을 김정은 정권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진행하려는 뜻이 엿보인다. 다만 이런 지시는 예전부터 이어져오던 것이며 최근에 갑작스럽게 달라진 건 아니라고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정보위 간사는 말했다.

◇ 다시 불거진 ‘10월 위기설’

국회 정보위 이완영 자유한국당 간사는 “북한의 10월 미사일 발사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어 국정원 측에 물어보니 ‘아직 어느 정도 규모고, 몇천㎞ 급인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경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전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국정원 북한담당 국장은 “추석에 집에서 쉬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미 간 거세진 ‘말싸움’과 함께 추가적인 미사일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동안 수그러들었던 ‘한반도 위기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대미 성명 등 북·미 간에 격화된 설전은 언제든 돌발적인 무력행사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특히 북한 최대 이벤트 중 하나인 노동당 창건기념일(10월10일·쌍십절)을 전후해 북한이 다시 한 번 핵·미사일 도발을 할 경우 한반도 안보위기 지수는 최고조에 오를 수 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미 북한은 미국 전략폭격기 B-1B의 북한 영공 근접비행에 대해 “미국이 선전포고를 했다”고 주장하며 격추 위협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추가적인 군사적 조치’를 시사한 상태다.

북한이 사용할 수 있는 무력도발은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 3형’ 발사를 포함해 태평양상 미군기지가 있는 괌에 대한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 12형’ 포위발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 14형’ 발사 등 다양하다.

현재로선 북한이 어느 수준의 도발을 시도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북한이 ‘역대급 수소탄 실험’이라는 최강의 카드를 빼들 가능성도 있으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은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대화를 모색하는 전술을 즐겨 써왔다. 군사 전문가들은 26일 “태평양상 수소탄 실험은 방사능 누출 등 국제적인 공분을 불러올 수 있다”며 “북한은 미국이 실질적인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방안을 놓고 고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미 양국은 10월에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계획하고 있다. 이번 훈련에는 미국 항공모함 전단이 참가한다. 현재까지 몇 척의 항공모함이 참석할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방한한 스콧 스위프트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한반도 해역에서) 핵항공모함 2척이 공동훈련하는 방안도 옵션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처럼 항모 2척이 참가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항공모함은 웬만한 중소국가의 군사력에 해당되는 대규모 전력이어서 항모 2척이 참가하게 되면 역대 최대 규모의 한·미 연합훈련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 전략폭격기 B-1B 랜서.

이렇게 되면 전략폭격기 B-1B의 ‘공중 압박’에 이어 항모가 북상하면서 ‘해상 압박’ 강도 역시 높이게 된다. 한·미는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 항공모함을 최대한 북상시킨다는 데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 전문가들은 “미 항모의 NLL 인근 전개는 북한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며 “사실상 해상봉쇄에 버금가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 간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군사 전문가는 “미국과 북한은 현재 무력시위를 통해 자국의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할 뿐 무력충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며 “양쪽 가운데 어느 곳이라도 ‘위기의 사다리’에서 먼저 내려올 수 있는 방안이 도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