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병자년) 혹한의 겨울. 남한산성에서는 치열한 47일간의 사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조선의 임금은 청나라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지울 수 없는 치욕의 역사가 소설을 거쳐 영화로 재현됐다. 소재가 지닌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작품이 탄생했다.
영화 ‘남한산성’은 나라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두 사내의 이야기로 요약된다. 청과의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에 맞서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첨예하게 대립하는 둘 사이에서 인조(박해일)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청의 대군을 홀로 마주한 채 설원 위에 선 최명길의 굳은 뒷모습으로 문을 여는 영화는 시종 담담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중간 중간 상황을 환기시키는 인조의 한마디가 반가울 지경이다. ‘풋’ 하고 잠시나마 실소라도 터뜨릴 수 있으니. 이런 차분한 전개는 후반부 전투 액션신을 한층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쓰라린 역사를 대하는 황동혁 감독의 진정어린 태도는 이 영화 전반에 선연히 흐른다.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희순 조우진 등 각 배역을 빈틈없이 채워준 배우들에게 역시 그와 같은 뜨거움이 느껴진다. 조선과 청의 군사들, 조선의 백성들을 연기한 수많은 단역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테다.
무엇보다 빛을 발하는 건 이병헌과 김윤석 두 배우의 열연이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인조 앞에서 벌이는 설전(舌戰)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강렬한 케미스트리를 완성해낸다. 특히 짤막한 대사를 정확한 호흡으로 주고받으며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해내는 최후의 설전 신은 이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만하다.
25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언론시사회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병헌은 “사극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협녀: 칼의 기억’(2015) 이후 세 번째”라며 “이번 작품은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을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고증했다. ‘당시 최명길의 마음이 이런 거였겠구나’ 좀 더 신중하게 상상하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김윤석과의 설전 장면은 이병헌에게도 쉽지 않은 촬영이었다. “아마도 그날 대사가 가장 많았을 것”이라며 운을 뗀 이병헌은 “보통 리허설을 하다 보면 상대방이 어떻게 연기할지 예상이 되는데 김윤석은 매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하더라. 불같은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고 혀를 내둘렀다.
극찬을 들은 김윤석은 “당시 비하인드가 있었다. 최종 대본이 바뀌었는데 그걸 모르고 이전 대본을 숙지하고 갔다. 현장에 도착해 그 사실을 알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의도적으로 변화구 직구 체인지업을 섞어가며 던진 게 아니라 급조하다 보니 연기 밸런스가 바뀌었던 것”이라면서 “(이)병헌씨가 잘 받아줘서 좋은 장면이 나온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황동혁 감독은 “이 작품을 영화화할 때 가장 중점 둔 지점이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이었다”며 “인조를 둘러싼 두 사람의 사상적 대립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캐릭터들은 조금씩 생략한 부분이 있다. 소설처럼 방대한 분량을 다 담을 수 없는 여건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단, 내가 할 수 있는 한 각 캐릭터에 동기를 부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했으나 몇몇 부분은 황동혁 감독이 각색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따로 만나 진심어린 소회를 나누는 장면이나 김상헌 캐릭터 관련 결말 처리 등에서 원작과 차이가 있다.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은 조선군의 가장 큰 참패였던 북문 전투신이었다. “비극 안의 수많은 감정들을 제대로 묘사해보고 싶었습니다. 북문 전투 전체 시퀀스를 10회차에 걸쳐 찍었어요. 노력한 만큼 상당히 만족스럽게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황동혁 감독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한반도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380년전 역사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오는 10월 3일 개봉.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