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미안했다고, 더는 아프지 말라고 [리뷰]

입력 2017-09-24 16:09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 할머니를 연기한 배우 나문희. 리틀빅픽처스 제공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간절함.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용기. 그 사무치는 마음을 내치지 않고 감싸 안아주는 따스함. 상처를 함부로 헤집지 않고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사려 깊음.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가 특별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팔순의 민원왕 옥분(나문희). 시장 한구석에서 수선집을 운영하며 홀로 지내는 그에겐 또 다른 ‘임무’가 있다. 주민들이 불편해할 만한 온 동네 크고 작은 문제를 파악해 구청에 알린다. 20년간 접수한 민원만 8000여건. 남들은 유난이라 손가락질 할지언정, 그건 옥분 나름의 이웃 사랑이었다. 고독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고.

칼 같은 원칙주의자 구청 공무원 민재(이제훈)와는 사사건건 부딪힌다. 그러던 어느 날 민재가 영어 실력자임을 알게 된 옥분은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영어 수업을 시작하고, 옥분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한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민재와 가족이 없는 옥분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의지해간다.


여기까지는 흔한 휴먼 코미디의 전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옥분이 간직하고 있던 아픈 비밀이 밝혀지면서 영화의 속살이 드러난다. 어릴 적 옥분은 일본군 위안부였다. 고생 끝에 돌아왔으나 과거사를 숨긴 채 평생 외로이 살아야 했다. 미국 입양 간 남동생을 만나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그는 미 의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청문회에 당당히 증언자로 나선다.

‘아이 캔 스피크’는 2014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이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21) 통과의 발판이 된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극 후반부 재현된 청문회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찍는다. 쥐어짜는 신파가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관객을 울리고 만다.

웃음으로 문을 열고 감동으로 끝을 맺는 서사. 이 흔한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아이 캔 스피크’는 결코 진부함을 내비치지 않는다. 암울한 역사가 지닌 문제의식을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오히려 참신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그저 우리네 평범한 이웃이라는 메시지. 그 살가운 시선만으로 이 작품은 가치를 다한다.


옥분 역의 나문희는 마음을 흔드는 연기란 무엇인지 보여준다. 모진 세월의 격랑을 주름진 얼굴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여전히 소녀 같은 미소로 활짝 웃고 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무언가가 응축돼 있다.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는 수준의 말로는 표현되지 못할 묵직함으로 극을 빈틈없이 채운다.

이제훈은 극 안에 온전히 녹아들어 제 역할을 십분 수행해낸다. 냉철하기 그지없다 점차 말랑말랑 녹아내리더니 끝내 뜨겁게 발산하는 감정선을 유려하게 그려낸다. 전작 ‘박열’(감독 이준익)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일침을 가한 그는 또 한 번 의미 있는 외침을 날렸다.

극 중 이제훈이 나문희에게 묻는다. “하우 아 유(How are you)?” 곱씹어보면 그 얼마나 정다운 인사말인가. 안녕하냐고, 잘 지냈느냐고, 상대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살가움이 어려 있으니. “아임 파인, 땡큐. 앤 유(I'm fine. Thank you. And you)?” 나는 괜찮다고, 바라봐줘 고맙다고, 그 친숙한 대답이 날아와 아프게 꽂힌다. 119분. 12세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