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군비 경쟁이 이어지던 냉전 시절, 세계를 핵전쟁으로부터 구한 남자가 그가 살려낸 세상과 조용히 작별 인사했다. 향년 77세.
영국 BBC와 일간 가디언은 핵전쟁의 위협에서 인류를 구해낸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전 소련군 중령이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고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세상을 구한 남자(The Man Who Saved the World)'라는 그의 거창한 별명과는 다른 조용한 죽음이었다. 페트로프 중령은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프리야지노에서 혼자 살다 5월 19일 마지막 일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냉전 위기가 최고조로 치닫던 시절,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페트로프 중령은 핵전쟁이 발발하려는 상황에서 신중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인류를 대재앙으로부터 구해냈다. 그는 1983년 9월 26일 모스크바 외곽의 비밀 대공관제센터에서 미사일 탐지 스크린을 응시하며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미군이 핵탄두가 실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5기를 발사했다는 경보가 울렸다. 규정대로라면 당장 사령관에게 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보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페트로프 중령은 침착했다. 그는 만일 미국이 핵전쟁을 벌이기로 작정했다면 고작 다섯 발의 미사일만을 발사했을 리 없다고 판단했다. 또 다른 레이더들은 미사일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페트로프는 해당 탐지 레이더가 오작동했다고 판단하고 상부에 “조기 경보 시스템이 오작동했다”고 보고했다. 그의 판단에 따라 발사준비에 돌입해 있던 소련 내 ICBM 통제소와 발사대는 비상해제 됐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은 23분 뒤에 밝혀졌다. 소련 인공위성이 문제였다. 인공위성이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을 미국이 발사한 미사일이 낸 빛으로 오인하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페트로프 중령이 탐지 내용을 있는 그대로 상부에 보고했다면 곧장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인류를 구해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지만 이후 그의 삶은 이 사건과 함께 비밀에 부쳐졌다. 그는 자연스레 군에서 퇴출 당해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조용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당시 미국과 더불어 초강대국 지위를 점하고 있던 소련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바깥으로 공표할 경우 자국 인공위성의 결함을 세계에 드러내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그의 공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의 아내조차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알지 못한 채 1997년 눈을 감았다.
그가 복권된 것은 1998년 유리 보틴체프 전 소련 미사일 방어 사령관의 회고록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후 페트로프 중령은 2006년 유엔 세계시민상을, 2013년에는 드레스덴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삶은 2014년 ‘세상을 구한 남자’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현됐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