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43)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악(惡)으로 점철된다. 인간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이면을 들춰낸다. 어두컴컴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각본을 쓴 ‘악마를 보았다’(감독 김지운·2010) ‘부당거래’(감독 류승완·2010), 연출까지 한 ‘신세계’(2013)가 그랬다. ‘대호’(2015) 정도가 예외라 할 수 있다.
지난달 개봉한 ‘브이아이피’(V.I.P)에서 역시 자신의 색깔을 흠뻑 담아냈다. 한국 국가정보원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합작해 기획 귀순시킨 북한 고위층 자제 광일(이종석)이 연쇄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며 벌어지는 이야기. 사이코패스가 저지르는 잔혹한 범죄 상황을 적나라하게 재연한 영화는 시종 스크린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청불’ 등급임을 감안해도 ‘브이아이피’의 표현 수위는 지나치게 적나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여성 피해자를 고문·교살하는 과정을 샅샅이 보여준 장면에 대해 불쾌감을 토로하는 관객이 상당수다. 여성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이용했다는 지적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자연스레 ‘여성 혐오 영화’라는 오명까지 따라붙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훈정 감독은 영화에 대한 그 어떠한 비판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민감한 질문에도 그는 결코 돌려 말하거나 피하려 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선택대로 영화를 만들었고, 평가는 관객의 몫이며, 그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다만 고민을 계속해나가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과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작품 사이의 간극을 줄여나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여성에 대해 무지했는지 깨달았다”는 그는 솔직담백한 생각들을 들려줬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차갑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작품 방향을 택하게 된 이유는.
“되게 건조하고 서늘하고 차가운 누아르를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퍼석퍼석 모래 씹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건조하게 만들어보고 싶었죠. 냉정한 인물들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는 그림을 생각했어요. 어쭙잖게 서로 이해한다거나 하는 것 전혀 없이.”
-각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생략되다시피 해 관객 입장에서 감정을 싣기가 어렵더라.
“배우들도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보통의 영화는 캐릭터 중심이라서 특정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그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거리를 두게 하죠. ‘관객에게 익숙지 않을 것 같다’는 고민은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왜냐면 처음부터 사건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거든요. 코너에 몰린 각각의 조직을 대변한 인물들이 사건에 던져지는 거죠. 때문에 인물의 개인사는 필요치 않았어요.”
-극 중 광일은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로 그려진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설정한 이유는.
“이 인물은 선천적 악(惡)이거든요. 일반 사이코패스와 달리 광일은 범죄에 대한 자각이 없어요.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이를 사람으로 보지 않거든요.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게 죄라는 인식 자체가 없죠. ‘심심해. 쟤 데리고 와 봐’ 하고 재미로 죽여요. 타인을 놀리고 조롱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걸 자연스럽게 즐기는 놈이에요. 처음부터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끝판왕’으로 설정한 거죠.”
-초반부 등장하는 고문·교살 장면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았다는 지적이 있다.
“그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느냐 마느냐 내부적으로도 고민이 많았어요. 그 부분을 빼자니 광일의 악마적인 모습이 안 보여서 결국 넣기로 했어요. 어느 정도 불편하실 거라 예상은 했는데 여성분들은 그 이상의 강도로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제 스스로 여성에 대한 이해가 많이 떨어진다는 걸 인정하는데,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편하게 느끼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거고, 그 부분에 대해 당연히 얘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선택에 따른 결과이니 감수해야죠.”
-작품을 만들 때 범죄 묘사에 있어 특히 고민되는 지점이 많을 것 같다.
“그런 부분은 고민을 많이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요. 특히 사회적 약자를 표현할 때는 더 고민해야죠. 한 번 고민할 것도 두 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혈이 낭자한 누아르 장르에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이유가 있나.
“사실 제 영화에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오진 않아요. 표현 강도가 세서 그렇게 느끼시는 거죠. 저는 폭력은 폭력으로 표현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범죄물에서 폭력행위가 액션 신처럼 그려지고 그걸 본 관객들이 쾌감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저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나게 담으려는 편이에요.”
-‘대호’ 흥행 실패 이후 힘든 시기를 겪다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가 ‘브이아이피’라고.
“네. 고민이 굉장히 많았던 시기였죠. 지금도 그 고민이 끝난 건 아니고….”
-어떤 고민인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나.
“사실 ‘대호’는 처음부터 ‘내가 과연 이 작품을 할 만한 그릇이 될까’란 고민이 큰 작품이었어요. 찍고 나서도 많이 모자랐다는 생각에 굉장히 힘들었죠. ‘내가 계속 영화를 만들어도 되나’ 싶기도 했고요.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뭐든 써야겠다’는 마음에 시작한 게 ‘브이아이피’였어요. 처음에는 책으로 쓸 생각이었는데 주변의 권유로 영화화하게 됐죠.”
-다시 연출하리라 마음먹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영화할 때가 제일 좋으니까 (별 수 없었죠). 사실 그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솔직히 제 성향이 대중적이진 않거든요. 매 작품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대중이 원하는 것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요. 어쨌든 저는 상업영화를 하는 사람이니 그 줄타기를 절묘하게 잘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네요.”
-‘신세계’의 성공이 그런 면에서 자신감을 주지 않았나.
“‘신세계’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아무도 그렇게까지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웃음). 당시 한국은 누아르 불모지였어요. 누아르 명작이라 불리는 ‘달콤한 인생’(감독 김지운·2005)도 흥행 성적은 저조했죠. ‘한국에서 누아르는 안 된다’는 게 정설이었어요. ‘신세계’도 본전만 넘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예상 외로 터진 거예요. 아무래도 동양적인 정서에 잘 맞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끈끈한 우정과 의리, 브로맨스 같은 게 적절히 녹아있었죠.”
-같은 누아르지만 ‘신세계’와 ‘브이아이피’는 결 자체가 달랐던 셈이네.
“그렇죠. 그런 진한 누아르에 익숙해진 상황에 갑자기 차갑고 건조한 누아르를 한다니까 다들 반신반의했어요. 적잖은 위험 부담이 있었죠. 관객이 누아르 장르에 기대하는 바가 분명히 존재하고, 더구나 박훈정이 다시 누아르를 한다고 하니 전작에서 오는 기대감이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정말 이렇게 하고 싶다. 그래야 할 것 같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어요.”
-본인의 작품 세계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각자의 욕망이 드글드글 끓는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는 이야기를 주로 해왔고, 그런 걸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아요. 인물 간 역학관계에 흥미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것이 내 작품 세계냐고 하면, 잘 모르겠네요. 요새 고민이 참 많아서(웃음).”
-장르적인 면에서 변화를 줘볼 생각은 없는지.
“누아르적인 성격이 완전히 가시진 않겠지만 뭔가 다른 것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해요. 정말 퍼석퍼석하고 건조한 무협도 한 번 해보고 싶고요. 근데 실현될지 여부는 모르죠. 내가 좋아하는 작품 성향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계속 고민 중입니다.”
-‘신세계’를 넘어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것도 느끼나.
“부담보다는 그늘이 짙죠. 많이 짙어요.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니까. 매 작품마다 ‘신세계’와 비교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이 있어요. 다른 작품으로도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굳이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어차피 그것도 내 작품인 걸요. 어쨌든 ‘신세계’ 시리즈를 끝내기는 해야 되는데…(웃음).”
-차기작은 여성 원톱 영화 ‘마녀’라고. 준비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
“시나리오는 다 완성됐고, 곧 촬영을 들어갈 것 같아요.”
-그 다음 작품이 ‘신세계’ 시리즈인가.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투자배급사와 계속 얘기 중이니까 조만간 구체화되겠죠.”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