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오후 11시10분부터 11시50분까지 약 40분간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 두 정상은 '한·미 미사일 지침'을 우리 정부가 원하는 수준으로 개정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500㎏에 묶여 있던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북한의 위협에 맞서 최소 1t 이상으로 늘리는 데 동의했다.
오랫동안 논의돼온 한·미 동맹의 '과제' 하나가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하루를 조금 넘긴 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기자들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번 주에 참모들과 한·미 FTA 폐기를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양국 무역전쟁을 예고하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동맹의 결속을 다진 지 하루 만에 동맹의 갈등을 유발한 트럼프의 말에 여기저기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의 발언이 FTA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전략적인 언급인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 '한·미 동맹' 다진 정상 통화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일본 상공을 지난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자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는 엄중한 도발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우리 공군이 대량 응징 능력을 과시하는 강력한 대응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강력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두 정상은 “북한에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을 가해 도발을 억제하고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와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공유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이 같은 인식을 토대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미사일 지침을 한국이 희망하는 수준으로 개정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2012년 개정된 미사일 지침은 사거리 800㎞에 탄두 중량 500㎏이었다. 이 중량을 최소 1t 이상으로 늘리는 협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한·미 정상은 이달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만나 북핵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 남부지역에 막대한 규모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긴 초강력 허리케인 ‘하비’에 대해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또 조속한 극복을 기원하며 피해복구 노력에 동참할 수 있다는 뜻도 표명했다.
◇ '한·미 갈등' 촉발한 트럼프 발언
이렇게 우호적인 통화를 한 지 약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FTA '폐기' 카드를 꺼내들었다. "폐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참모들은 "그럴 때가 아니다"라며 반대했고, 그래서 "이번 주에 참모들과 논의하겠다"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참모들의 반대 논리는 웬디 커틀러(사진)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최근 미 의회전문매체 ‘더힐’ 기고문에서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미 FTA 체결 당시 미측 수석대표를 지냈던 커틀러 전 부대표는 “북한 미사일 위협이 점증하는 이때에 한·미 동맹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며 “한·미 FTA 재협상을 조심스레 다루지 않으면 민감한 시기에 양국 무역갈등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2일(현지시간) "이번 주에 참모들과 한·미 FTA 폐기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언론에 공개했다. 로이터 통신은 허리케인 ‘하비’ 피해를 당한 텍사스주 휴스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이같이 말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폐기' 발언이 나오게 된 과정을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폐기를 준비하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는데,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북한 핵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한·미 FTA를 폐기하면 동맹관계에 경제적 긴장이 야기되고, 자칫 한국 정부를 고립시킬 우려가 있다는 논리로 반기를 들었다고 한다.
◇ '협상의 기술'?… 트럼프 발언 진의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FTA 폐기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취임 이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도 폐기하려다 측근들과 산업계의 적극적인 로비 이후 마음을 바꿨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멕시코의 협상 태도를 문제삼으며 NAFTA를 폐기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일(현지시간) “트럼프 정부가 한미 FTA 폐기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면서 “다만, 백악관이 정말 폐기를 고려하는 건지, 협상기술의 하나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건지 불분명하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미FTA 재협상 결과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부터 보고받은 뒤 협정 폐기 쪽으로 기울었다고 WSJ는 전했다. 이 문제를 논의할 이번 주 회의에서 국무부와 국방부는 사드 배치를 포함해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는 시기에 무역 마찰을 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신문은 예상했다.
미국 업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전미제조업협회는 회원사들에게 긴급 이메일을 보내 행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을 접촉해 한·미 FTA 폐기를 중단하라고 설득하도록 독려했다. 미 상공회의소도 “한·미 FTA 체결이후 항공수출이 80억 달러로 두 배 증가했고, 두 자릿 수 관세가 폐지되면서 주요 농산물 수출도 껑충 뛰었다”며 “한·미 FTA를 폐기하면 백악관과 업계와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 의회의 반대도 예상된다. 미 의회는 지난 7월 중순 라이트하이저 USTR 대표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미 FTA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적 전략적 관여의 핵심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미 FTA를 폐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