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가는 살인자와 그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연쇄살인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영화로 재탄생했다. 단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는 스릴과 서스펜스는 여전하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병수(설경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어릴 적 가정폭력의 후유증을 앓고 살아가는 그는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청소하기 위해 살인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뇌에 문제가 생긴 이후 17년간 살인을 멈추고 평범한 동물병원 원장으로 살아간다.
병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은희(설현)가 있다. 그리고 딸에게 접근하는 한 남자가 있다. 우연히 만난 경찰 태주(김남길). 태주를 처음 본 순간 자신과 같은 ‘살인자의 눈’을 갖고 있다고 직감한 병수는 계속해서 그를 의심하고, 은희의 곁에서 떼어놓으려 애를 쓴다. 그렇게,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 속도감 있게 이어진다.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흐름을 꽉 잡아주는 건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태주 역의 김남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 오묘한 얼굴과 세밀한 감정 처리로 시종 관객의 뇌리를 헤집는다. 은희 역으로 생애 처음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한 설현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극에 녹아든 모습을 보여준다.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설경구다. 은퇴한 60대 연쇄살인범으로 분한 그는 외형부터 내면 연기까지 인물에 혼연일체된 듯한 역할 소화력을 자랑한다. 미세한 표정 변화와 얼굴 근육의 떨림만으로 인물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표현해낸다. 기억과 망상 속에서 헤매는 인물의 혼란 또한 그를 통해 선명하게 전달된다. 배우 스스로 자신의 한계치를 또 다시 경신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8일 서울 동대문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설경구는 “나에게 김병수라는 역할은 굉장히 큰 산이었다”면서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제가 간접경험조차 해볼 수 없는 것이어서 상상력을 발휘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과 상의하며 만들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숙제였다”고 말했다.
이어 “내 연기를 보느라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했다. 한 작품을 끝내고 완성본을 처음 볼 때마다 ‘더 잘 표현해볼 걸’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다음 작품에는 안 그래야 할 텐데”라고 웃었다.
원작과 가장 달라진 지점은 태수 캐릭터다. 병수와 대립하는 하나의 축을 만들기 위해 인물에 살을 붙여 정교하게 가공했다. 원신연 감독은 “태주 캐릭터는 그 자체로도 존재하지만 제가 새로 구성하면서 그가 김병수의 과거 혹은 현재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요하게 그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태수 역의 김남길은 “큰 틀만 정해져 있을 뿐 많은 걸 첨가해서 만들어낸 역할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며 “나는 원래 뾰족하고 날카로운 느낌의 인물을 생각했는데 감독님과 (설)경구 형이 덩치가 있는 몸에서 오는 서늘함을 나타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주셨다. 난 영화에서 실제 비주얼보다 잘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역할은 잘 나온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산 속을 뛰거나 몸싸움을 벌이는 등 액션 신을 소화한 설현은 “두 선배님에 비하면 외형적으로 큰 변화가 있지도 않았고 큰 액션도 없었던 터라 내가 힘들었다고 말할 순 없다”며 “다만 병수를 점점 의심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심리를 표현하는 게 굉장히 어렵더라. 감독님께 많이 여쭤보며 연기했다”고 얘기했다.
원신연 감독은 “내가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소설을 읽고 영화화를 결정했을 때 마음먹었던 지점이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영화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며 “문장이나 문체 독백 등 소설의 원형을 많이 반영했다. 소설을 보지 않은 분들이 영화를 보셔도 무리가 없게끔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일단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면서 “소설에서는 주인공 김병수를 응원까지 하긴 어렵지만 점차 빨려드는 매력이 있었다면, 영화에서는 적어도 관객이 따라가면서 응원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고 덧붙였다.
“아무래도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보니까, 소비되기보다 기억되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스릴러 장르의 저변이 확대됐으면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스릴러도 편안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으면. 관객들이 좀 더 극장을 많이 찾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원신연 감독)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