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1000만명”
누구도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영화 ‘군함도’는 개봉 전 1000만 관객은 물론 역대 최다 관객 기록도 넘봤다. 여건도 충분해보였다. 배우 황정민, 송중기, 소지섭, 이정현 등 초호화 캐스팅에 성공했고, 1341만명 관객을 동원해 ‘명량’(1761만) ‘국제시장’(1426만)에 이은 역대 3위 기록의 영화 ‘베테랑’을 만든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하시마 군도로 강제 징용돼 목숨 걸고 탈출을 시도한 400여명 조선인 이야기는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개봉 22일째인 16일, ‘군함도’는 “무조건 1000만” 영화에서 “잘해야 750만” 영화로 전락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군함도’는 15일 기준 누적관객 651만2405명, 예매율 1.4%(예매관객수 2827명)를 기록하고 있다. 손익분기점인 700만 관객도 힘들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군함도’의 흥행 침몰은 크게 ①스크린 독과점 ②역사 왜곡 논란 ③경쟁작 '택시운전사' 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스크린 레드라인 ‘2000’
‘군함도’는 개봉 첫날부터 이슈였다. 개봉일 최다 관객(97만352명)이라는 희소식이 있었지만, 이보다는 ‘평점 테러’가 더 눈길을 끌었다. 평점 테러의 주된 이유는 스크린 독과점이었다. ‘군함도’는 개봉일에 전국 2700여개 상영관 중 2027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전체 스크린의 75%를 군함도가 가져갔다. 이 때문에 대형 배급사의 독과점을 통해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으며 일부 관객들로부터 평점 1점을 받아야 했다.
대형 배급사의 스크린 독과점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한 ‘명량’은 1587개 스크린을 확보했고, 역대 2위 ‘국제시장’은 같은 시기에 개봉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 비해 5배나 많은 스크린을 가져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 영화도 2000개 이상 스크린을 확보하진 않았다. 2000이란 숫자는 일종의 ‘레드라인’인 셈이었는데 ‘군함도’는 그 선을 넘었다. 이에 누리꾼들은 “국내 전체 스크린이 2700개인데 ‘군함도’가 2100개를 가졌다” “영화판 강제징용이다” “경의중앙선 배차 횟수보다 영화 ‘군함도’ 상영 횟수가 훨씬 많다” 등의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사랑이 이긴다’ ‘괜찮아 울지마’ 등을 연출한 민병훈 독립영화 감독은 SNS에 "‘군함도’의 스크린 독과점은 독과점을 넘어선 광기”라며 “기네스에 올라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상생은 기대도 안 한다. 다만 일말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꼬집었다.
◇ 역사왜곡과 신파극의 결과물 ‘국뽕’
영화 내적인 문제도 있었다. 역사왜곡 논란이 대표적이다. ‘군함도’에서는 한국인 내부의 갈등, 일본인과 한국인 지도자 사이의 음모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요한 사건으로 배치됐다. 하지만 실제 기록에는 일본과 밀약을 맺은 조선인 민족지도자나 광복군이 주도한 군함도 탈출 계획은 없었다.
물론 영화는 재미를 위해 역사를 재가공할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이 각색에 많은 이들이 불편해했다는 점이다. “무조건 일본이 나쁘다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려 했다” “나쁜 일본인만 있던 것도 아니고 좋은 조선인만 있던 것도 아니다” (류승완 감독) “이웃 국가인데 역사적인 문제로 왜 늘 틀어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과 친해지면 좋겠다”(이정현) 등의 발언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역사에 없었던 ‘반역자’와 ‘음모’ 등이 영화에 배치된 터라 “명예 일본인 같다” “뉴라이트 아니냐”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일제의 탄압과 강제징용자들이 겪었던 참상에 집중하기보다 신파적 요소에 치중해 역사 영화가 아닌 액션 영화 같았다는 비판도 거세다. 역사 강사 최태성은 SNS에 “역사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제 ‘군함도’ 해설 강의까지”라며 “실제론 어마어마한 초대형 블록버스터급 ‘탈출 영화'이고 군함도는 그냥 배경이 되는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탄광노동자들은 최정예 전사로 변신했고, 그 중심에 배우 송중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판 ‘태양의 후예’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욱일승천기를 잘라내는 장면, 일본인 관리자를 죽이는 장면 등은 장르적인 쾌감을 위해 ‘반일감정’을 악용한 것 아니냐는 식의 ‘국뽕’(‘나라 국’과 ‘히로뽕'을 합성한 말. 과도한 국가주의를 조롱할 때 쓰인다)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 '군함도' 추월한 '택시운전사'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경쟁작들이 흥행하면서 ‘군함도’의 주목도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지난 2일 개봉한 ‘택시운전사’다.
‘택시운전사’는 개봉 첫날부터 최고의 스타트를 보였다. 개봉 첫날부터 군함도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택시운전사’는 15일 기준 누적관객 902만4263명을 기록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예매율도 24.7%(예매관객수 4만9419명)로 15일 첫 개봉한 ‘혹성탈출:종의 전쟁’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어 1000만 관객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는 ‘군함도’의 덕을 본 케이스이기도 하다. ‘택시운전사’의 개봉 첫 주 스크린 수 1446개로 이 역시 과도한 스크린 점유로 비판받을 수 있었지만 ‘군함도’의 2027개 스크린과 비교해 ‘착한 영화’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다. 관객 평점도 높다. ‘군함도’가 개봉 첫날 별점 테러를 받았던 반면 ‘택시운전사’는 첫날 네이버와 다음에서 각각 9.38점과 9.5점을 받았다.
이밖에 지난 9일 개봉한 강하늘, 박서준 주연의 ‘청년경찰’도 누적관객수 273만5917명을 기록하며 인기몰이 중이고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개봉 첫날 57만5118명을 끌어들이며 흥행을 예고하고 있어 ‘군함도’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