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이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당시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은 패망하고 미군정의 통치 아래로 들어갔다. 아시아 주변국을 침략하고 연합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망한 일본인은 모두 310만명. 군인과 민간인을 합산한 수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침략 피해국은 물론 파시스트에게 전쟁의 소모품으로 이용당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 국민에게도 비극이었다.
일본은 히로히토 전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던 이날을 패전일(일본 명칭 종전일)로 지정하고 매년 전몰자 추도식을 진행한다.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미지만, 이 추도식에 임하는 표정은 제각각 다르다. 15일 일본 도쿄 치요다구 무도관에서 열린 제72회 추도식에선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신조 총리가 추도사를 낭송했고, 6200명의 유족이 참석했다.
3년 연속 ‘반성’ 말한 일왕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총리와 다르게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 수호를 주장하는 반전주의자다.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을 경험했던 그는 침략의 피해를 입은 주변국에 대해 반성의 의사를 에둘러 표하기도 했다. 1990년 방일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나 한일 과거사를 놓고 이야기하면서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반성을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추도식에 참석해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2015년부터 3년 연속 이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전장에 흩어져 전화에 쓰러진 사람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국민과 함께 표한다. 세계 평화가 한층 더 발전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전쟁을 원망하는 유족
제국주의 시절 일본군 유족 중에도 자국의 전쟁범죄를 원망하는 사람은 있다. 후쿠오카에 거주하는 98세 치요코 우라노는 패전을 두 달 앞둔 1945년 6월 남편의 사망 통보를 받았다. 당시 치요코는 스물여섯, 남편은 스물네 살이었다. 미국 콜로라도로 이민했던 남편은 일본으로 돌아가 국적을 얻은 뒤 “확실하게 인정받고 싶다”는 이유로 자진 입대했고, 연합군과 전투 중 죽었다. 치요코는 이후 홀로 자녀를 양육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렇게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치요코는 패전일을 맞아 인터뷰한 마이니치신문에 “전쟁이 원망스럽다. 이것만은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다”며 “젊은 사람들이 전쟁에 더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치요코의 인터뷰는 일본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 헤드라인으로 소개됐다.
뉴스 게시판에는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양론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뉴스 게시판은 여전히 넷우익(일본의 극우 네티즌)이 판을 치고 있지만, 이날만큼은 치요코처럼 반전을 요구하는 이용자들의 댓글과 충돌했다. 전범국의 오명을 씻을 수 없는 자국의 역사를 원망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게 불거졌다.
‘평화’ 말하면서 주변국 사과 없는 전범국 총리
아베 총리는 추도사에서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절 자국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주변국과 연합국에 대한 사과, 이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으로서의 반성은 없었다. 집권하고 5년 연속으로 패전일 추도식에서 ‘사과’나 ‘반성’이라는 표현을 추도사에 넣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범죄를 일으킨 일본군의 죽음을 ‘값진 희생’이라고 치켜세워 경의와 감사를 표했다. 아베 총리는 추도사를 시작하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값진 희생 위에 세워졌다. 우리는 그 일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화를 언급했다.
그는 “종전 이후의 일본은 일관적으로 전쟁을 기피하고 평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였다.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힘썼다”며 “(전범국의) 역사를 겸허하게 대하면서 이 부동의 방침(전쟁 반대)을 고수하겠다. 분쟁의 온상이 되는 빈곤 등 여러 과제를 진지하게 대응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추도사에서 평화를 강조했지만 정작 평화헌법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자위대를 군으로 격상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일본을 개조하고 있다. 그는 이날도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공물료를 납부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