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현(37)은 매번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을 고른다. “아무거나 대충 타협해서 영화를 찍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때가 많지만 오히려 그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그만큼, 그에게는 매 작품이 소중하다.
영화 ‘군함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늘 책임감을 갖고 연기하려 노력한다”는 그가 뜨거운 사명감을 안고 임한 작품이다.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의지였다. “굉장히 책임감이 컸고, 절박했어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존 인물처럼 보일 수 있을까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했죠.”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현은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군함도’를 향한 관객 반응이 여러 갈래로 나뉜 상황에 짐짓 당황한 듯도 했다. 그는 “(작품을 선보이게 돼) 행복하거나 기쁘다기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크다”고 털어놨다.
“모든 것은 관객 분들이 판단해주시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지옥 같은 현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등재 당시 했던 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않고, 여전히 강제징용 사실을 숨기고 있잖아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만행도 마찬가지이고요.”
원조 한류스타로서 민감한 외교적 이슈를 담은 영화 출연이 꺼려졌을 법도 하다. 이정현은 “난 10년 전에 일본 활동을 했다. 소지섭 송중기야말로 일본 시장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영화에 참여한 것 아닌가. 너무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류승완 감독에 대해서는 “위안부 관련 다큐를 많이 봤는데 친일파 문제가 실제로 있었다. 피해자 증언을 살펴보면 조선인에게 속아 끌려갔다는 내용이 많았다. 상업영화임에도 이런 불편한 진실을 숨기지 않고 꼬집은 점이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극 중 이정현이 연기한 오말년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도 강인하게 버텨낸 조선인 여성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함도에 끌려와 다시 유곽으로 보내지지만 그의 기개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인 소녀들을 다독이며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읽고 너무 고통스러워 울기도 했다”는 이정현은 철저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말년 캐릭터를 완성했다.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섭렵한 뒤 류승완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연기 톤과 말투 등 디테일한 부분을 조율해나갔다. 36.5㎏까지 몸무게를 감량했던 건 본인의 선택이자 의지였다.
“감독님이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등 남자배우들과 달리 저에게는 살 빼라는 주문을 안 하셨어요. 제가 먼저 ‘갈비뼈가 보이면 어떨까’ 제안을 드렸죠. 단역배우들도 모두 다이어트에 동참하셨어요. 그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대단해요. 우리가 그렇게 하나 되어 노력한 건 더 실감나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함이었어요. 다행히 건강하게 뺐고, 잘 회복했어요. 치맥 참는 게 제일 힘들었던 거 같아요(웃음).”
이정현은 “보통의 위안부 관련 영화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슬퍼하다가 끝나는 반면 ‘군함도’의 말년은 강하고 당당하게 일본에 맞선다. 그 지점에 끌려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무조건 한다고 했다”며 “이토록 현실적이고 강인한 말년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위안부가 느끼는) 고통을 계속 안고 있어야 하는 게 많이 힘들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만족감도 컸다”면서 “촬영 끝나고 샤워할 때 보면 온몸에 멍들고 타박상이 있는데, 그런 상처가 고마울 정도로 너무 좋았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아마 지옥 같았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고통을 다 즐긴 거 같아요. 제 다리에 흉터가 좀 남아있거든요. 레이저 시술 몇 번하면 없어지는 건데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아직 안 지우고 있어요. 너무 큰 축복이자 선물이에요.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조·단역 배우들과 하나가 돼서 함께한 기억이니까요. 너무 값져서 지우고 싶지가 않아요.”
작품 빈도가 잦지 않을지언정 이정현은 꾸준히 다양한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2015년에는 순제작비 6000만원이 들어간 다양성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해 제36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행보에서는 연기, 그리고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느껴진다.
“영화를 너무 사랑해요. 늙어 죽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어요. 제가 상업영화와 다양성영화 병행하는 이유도 명확해요. 상업영화가 나와야 다양성영화 제작 환경이 나아지거든요. 더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비록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현장을 즐기게 돼요.”
배우로서 꿈꾸는 거창한 목표는 사라졌다. “20대였으면 있었겠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욕심을 버리게 되더라고요. 대신 여유가 생겼죠. 마음 가는대로….”
그가 여전히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는 곳은 촬영장이다. “스스로 꼭 지키려는 약속이 한 가지 있어요. 최선을 다해 현장을 즐기는 것. 그래야 행복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