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말수가 적었다. 아무에게나 곁을 허락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어리다고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았다. 웬만해선 모든 일을 혼자 했다. 할머니는 오랜 시간 혼자였다. 할머니는 아마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런 결심’은 평생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26년 전 오늘,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한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다.
한 명의 김학순
김 할머니는 1924년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생후 100일이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독립군을 돕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연락이 끊겼다. 김 할머니는 15세가 되던 해에 평양에 있는 기생집의 수양딸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2년간 기생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영업에 나설 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양아버지와 중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와 양아버지는 중국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붙잡혔다. 그렇게 지옥 같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다. 강간과 구타가 시작됐다.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이 김 할머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몇 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일본군 위안소 생활 4개월.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과 중국을 오가며 은전장사를 하던 한국인 조원찬씨가 어느 날 밤 위안소에 들렀다. 그는 놀라 소리를 지르려 하는 김 할머니의 입을 막고 “나 조선 사람이야. 아무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그에게 사정해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김 할머니는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평생 함께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둘은 부부가 됐다.
두 사람은 딸과 아들을 한 명씩 낳았다. 1945년 한반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났고, 김 할머니의 네 식구는 이듬해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곧바로 홍역으로 딸을 잃었고,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에겐 아들만 남았다. 아들이 열 살 되던 해 여름, 어렵게 장사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김 할머니는 아들에게 바다를 보여줄 생각으로 큰마음 먹고 강원도 속초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아들을 잃었다. 바다에 들어가 놀던 아들은 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날품팔이로 근근이 살았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마저도 힘에 부쳤다.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에게 주는 쌀,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
수백명의 김학순
할머니는 우연히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원자폭탄 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 이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한 사연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여성단체와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했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는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 할머니는 분노했고, 여성단체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렇게 김 할머니의 증언이 나왔다.
1991년 8월 14일 기자회견장에서 67세 김 할머니는 50년 전 자신이 당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며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거린다”며 “종군 위안부를 운영한 사실이 없다는 일본 측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에 많은 피해자들이 일본의 전쟁 범죄를 뒤따라 고발했다. 한국의 피해자뿐 아니라 북한·중국·대만·필리핀·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각국에 퍼져 있던 피해자들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2년 일본 관방장관이던 가토 고이치는 제국주의 시절 자국이 위안부에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김영삼정부는 일본에 진상 규명과 보상을 촉구했다. 1993년에는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고노담화’가 나왔다. 비록 형식적이고 불충하게나마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위안부 관련 기술을 담았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는 듯했다.
‘합의했으니 해결됐다’는 범인
하지만 1997년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일본 우익단체들은 위안부를 인정하는 것은 ‘자학사관’이라며 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1965년 한·일 수교 협정 당시 ‘양국 국민 간 재산과 권리 문제는 해결됐다’는 조항을 이유로 위안부 관련 배상을 더 이상 거론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우익의 이런 논리는 위안부 문제를 과도하게 국가·민족의 문제로만 환원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 논리가 ‘개인 보상 청구권’이었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한 시민단체의 일본인 야마사키 히로미는 “만약 지금 어떤 여성이 강간을 당했는데 그 범인이 남편이나 부친과 합의가 끝났기 때문에 이미 해결됐다고 말한다면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일본 정부의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논리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은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초월하는 반인륜범죄라는 논리였다.
국내외 시민단체 역시 노력했다. 미국 하원은 2007년 본회의에서 일본에 위안부 관련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8년 유엔 인권위원회도 일본에 ‘책임을 인정하라’며 압박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2011년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당사자 빠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
하지만 박근혜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합의에서 피해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선언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한일관계 개선을 이유로 반인륜범죄에 대한 접근법이 돌연 선회됐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문재인정부는 출범 이후 지난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일본에 내비쳤다. 지난달 7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가진 첫 한일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우리 국민 대다수와 피해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를 직시하면서 양측이 공동으로 노력해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에는 박근혜정부에서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의 협상 과정 및 합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공식 출범시키키도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아 거센 비판을 받은 점을 고려해 TF에 ‘피해자 중심주의’를 견지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다시 37명의 김학순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종군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하니 말이나 됩니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 주십시오.”
김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4개월여 뒤면 김 할머니의 20번째 기일이다. 김 할머니가 일본 정부에 원했던 것은 그저 ‘미안하다’는 공식 사과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김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한 마디를 들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37명이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