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이하 현지시간) 북한 문제를 얘기하며 "평화적 해법(peaceful solution)"이란 표현을 꺼냈다. 뉴저지 베드민스터 골프클럽에서 휴가 중 기자들과 만나서였다. 지난 8일 같은 장소, 같은 자리에서 북한이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할 거라고 강력히 경고한 지 사흘 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관련해 '매우 위험한'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오늘 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하기로 했다"며 "희망 섞인 말이긴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평화적 해법을 나보다 더 선호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 발언 이후 연일 대북 발언 강도를 높여 왔다. 미국 언론조차 '말의 전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무력 충돌과 전쟁을 암시하는 어휘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위기가 고조된 지 사흘 만에 마침내 충돌 우려를 누그러뜨리는 언급이 나오며 방향을 선회하자 외신들은 막후에서 이미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 사흘간의 '말 전쟁'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을 촉발한 건 워싱턴포스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8일 북한이 ICBM에 탑재할 수 있도록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미 국방부 산하기관인 국방정보국(DIA) 보고서를 인용했다. 이는 북한이 '레드라인'에 바짝 다가섰거나 이미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몇 시간 뒤 기자들과 만나 “북한은 더 이상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며 “그들은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힘(power)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북한은 9일 “괌 포위사격 검토"라는 폭탄선언을 꺼내들었다. 전략군 대변인 성명을 통해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질세라 10일 “북한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과거 극소수의 국가만 경험했던 큰 곤경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같은 상황을 암시한 것이었다.
북한은 다시 위협 수위를 높였다. 김락겸 전략군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괌 포위사격'에 동원할 '화성-12형'의 발사 개수(4기), 비행 경로(일본 시마네현, 히로시마현, 고치현 상공을 통과), 비행 시간(1065초), 탄착 지점(괌 주변 30~40㎞ 해상)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 이른 시각 트위터에 글을 올려 “북한에 대한 군사옵션이 완전히 준비됐고 장전됐다(locked and loaded)”면서 “김정은이 다른 길을 찾기 바란다”고 했다. 괌 도발을 감행할 경우 군사적 응징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장전됐다’는 표현은 곧바로 반격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또 기자들과 만나 "화염과 분노란 경고가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며 “북한이 공격할 생각이라도 한다면 그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
◇ 사흘 만에 나온 "평화적 해법"
트럼프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중국은 (북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왔고, 항상 "중국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북핵 문제 해결의 열쇠를 중국이 쥐고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중국이 북한을 제어할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이를 활용해 북한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대북 강경 메시지가 사실상 중국을 향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중국이 가장 꺼리는 상황은 '동북아 정세'가 불안정해지는 일이다. 아슬아슬하게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동북아 상황에 급격한 변화가 초래될 경우 중국은 안보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중국을 겨냥해 '군사옵션'을 언급하며 동북아 질서를 뒤흔들어놓겠다고 압박한 셈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의 '말 전쟁'이 한 편의 공연이라면 주요 관객은 베이징에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할 것이라고 따로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고려하고 있는 제재는 매우 강하고, 매우 매우 높은 수준"이라며 "아마도 그보다 강한 제재는 없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과의 통화에서 이 '제재'가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로 '원유 공급 차단'을 꼽아 왔다.
◇ 막후의 미국과 북한
AP통신은 미국과 북한의 외교 라인이 수개월 간 막후 외교 접촉(backchannel diplomacy)을 해오고 있다고 11일 보고했다. AP는 미 정부 관계자들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고 전했다. 몇 시간 앞서 미 의회전문지 더 힐도 같은 내용을 기사화했다.
이 채널을 통해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송환이 이뤄졌으며 북한의 핵·미사일로 고조된 위기 상황도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위기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AP가 전한 막후 대화 통로는 미 국무부의 조셉 윤 대북정책특별대표와 박성일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였다. 윤 대표와 박 대사의 접촉이 정기적으로 이어져 왔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정부에 들어서도 이른바 '뉴욕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연일 군사적 대응을 언급하며 긴장이 고조됐지만, 동시에 대화를 통한 해결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P는 오바마 정부의 마지막 7개월간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완전히 단절됐는데, 트럼프 정부 들어 양측 모두 의지를 보이면서 '대화를 위한 대화'가 재개됐다고 전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최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북한이 대화할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북한의 얘기를 들을, 소통을 위한 다른 수단들이 북한에 열려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