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은 30도에 육박했고 습도는 70%가 넘는 날씨였다. 6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는 흰색 캐노피 천막이 줄지어 있었다. 그 안에 100여명의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이들은 무더위에도 답답한 마스크와 선글라스, 가면 등을 쓴 채로 있었다. 한 여성은 “뿌리 깊은 여성혐오(여혐)와 신변에 대한 위협 탓에 얼굴을 가린 채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 회원들은 이날 낮 12시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여혐 콘텐츠 생산 중단과 여혐 범죄에 대한 엄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여성혐오 범죄는 그만! 성차별 폭력을 그만둬라. 우리는 살고 싶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여성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네” “남자면 안전한 나라 여자면 불안전 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건 이른바 ‘왁싱샵 살인사건’ 때문이다. 지난달 5일 30대 남성 배모(31)씨가 여성이 혼자 일하는 왁싱업소를 찾아가 성폭행을 하려다 실패하자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다. 배씨는 BJ(인터넷방송 진행자)의 유튜브 영상을 본 뒤 해당 업소를 찾아간 것으로 드러났고, 검찰은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 혐의로 배씨를 구속기소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라인상에서는 지난해 5월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 이은 여혐범죄가 또 발생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집회 주최측도 “이번 사건은 여혐이 원인”이라며 “한국 사회는 ‘여혐’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부족하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밝혔다.
집회 참가자들은 이번 살인 사건뿐만 아니라 여혐 문화의 일상화도 규탄했다. 이들은 “일상 속 성적 대상화, 시선 강간과 ‘외모 품평질’ 등 생활 곳곳에 여성혐오 문화가 스며있다”며 “온갖 여성혐조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모든 콘텐츠 생산을 중단하라”고 밝혔다.
더불어 여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성들의 동참도 요구했다. 이들은 “침묵도 가해다. 당신의 침묵은 우리의 비명보다 날카롭다”며 “한국의 남자들은 왜 방조하는가? 항상 내빼기만 할 셈인가”라고 말했다.
이날 시위에는 충돌 방지를 위해 경찰 100명이 동원됐다. 경찰 관계자는 “시위 주최자들이 일베 등 회원들에게 온라인상으로 협박을 받았다고 우려했다”며 “이를 고려해 인원을 늘렸다”고 밝혔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