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민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의 희곡이 처음으로 국내에서 출판됐다. 히로시마 원폭을 소재로 한 ‘아버지와 살면’(정은문고). 그동안 ‘텐포 12년의 셰익스피어’ ‘달님은 예쁘기도 하셔라’ ‘무사시’ 등 그의 여러 희곡이 무대에 올려졌지만 출판된 적은 없었다.
주옥같은 희곡과 수필, 동화를 100여편 가까이 남긴 그는 평생 반전과 반핵을 외친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에서 일관되게 일본의 전쟁책임을 지적하는가 하면, 평화헌법 수호를 위한 시민단체를 이끌기도 했다. 그가 투철한 반전주의자가 된 데는 어린 시절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으로 극심한 가난을 겪은 것과 함께 1962년 방송작가 시절 취재차 히로시마를 방문했다가 원폭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판된 ‘아버지와 살면’은 1994년 9월 그가 이끌던 극단 고마쓰자의 34회 정기공연으로 초연된 2인극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3년 후 7월의 마지막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일간 다케조-미쓰에 부녀의 모습을 그렸다. 사실 아버지 다케조는 원폭 당시 세상을 뜬 만큼 유령일 수도 있고, 혼자만 살아남아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음과 사랑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분열된 미쓰에의 내면일 수도 있다. 결국 미쓰에는 자신 몫까지 살면서 원폭 문제를 기억하라는 아버지의 격려에 세상을 향해 나올 결심을 한다.
원폭이라는 심각한 소재를 다뤘지만 이 작품은 희극에 가깝다. 물론 눈물이 나는 장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분위기가 어둡지 않다. 특히 아버지 다케조의 과장되고 농담섞인 대사는 웃음 포인트다.
이 작품은 일본 원폭문학을 대표하는 이부세 마스지(1898~1993)의 소설 ‘검은 비’와 자주 비견된다. 일본 원폭문학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꼽히는 두 작품 모두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아버지와 살면’과 비교해 ‘검은 비’는 원폭의 공포와 비극을 리얼하고 슬프게 그렸다.
사실 이노우에는 평생 희극을 즐겨 썼다. 일본의 역사와 사회에서 묵직한 소재를 가져오되 풀어내는 방식은 늘 코미디였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밌게, 재밌는 것을 진지하게, 진지한 것을 유쾌하게, 그리고 유쾌한 것을 어디까지나 유쾌하게”라는 모토는 그의 작품 성향을 잘 드러낸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품이 공연된 적이 있다. 연출가 임세륜이 이끄는 극단 Da가 광주 민주화항쟁의 비극을 겪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각색해 2012년과 2014년 공연해 호평을 받았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