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27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3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한 것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형기(刑期)다.
그러나 법원이 김 전 실장에게 실형을 선고함에 따라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풍부한 법률지식과 프레임 뒤집기로 상황을 모면해왔던 김 전 실장도 ‘문화계 블랙리스트’ 위기는 피해가지 못했다.
2013년 박근혜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에 올라 ‘왕실장’ ‘기춘대원군’ 등으로 불리며 막후에서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그의 긴 정치 인생도 결국 징역살이로 끝나게 됐다.
◇김기춘의 정치 인생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누구보다 화려한 정치 인생을 살았다.
김 전 비서실장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는 초임검사 시절부터 출세지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5·16장학회 장학생 출신인 그는 5·16장학회를 통해 박정희 정부 핵심 실세 중 하나였던 신직수 전 법무장관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했다.
1972년에는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유신헌법 제정을 주도했고,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 살해범인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냈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불과 35세의 나이였다.
제5공화국에서는 한직을 떠돌았다. 중정 출신이라 정권의 실세였던 보안사 인사들과 껄끄러운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보안사령관 출신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77년 윤운학 중령 월북사건을 조사하면서 국군보안사령부 조직을 축소한 김 전 실장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도 청와대 비서관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검찰후배 박철언에게 줄을 대 검찰 조직 내에서 쫓겨나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다.
제6공화국은 김 전 실장의 전성기였다. 6공의 황태자였던 박철언이 김 전 실장을 밀어줬기 때문이다. 1988~1990년에는 검찰총장을, 1991~1992년에는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 전 실장의 출세가도는 민주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어졌다. 1996~2008년까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내리 3선을 역임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2013년 청와대 비서실장에 올라 ‘왕실장’ ‘기춘대원군’ 등으로 불리며 권력의 핵심자리에 올랐다.
물론 김 전 실장이 평탄한 길만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긴 정치 인생에서 그는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마다 그는 천부적인 처세와 프레임 뒤집기, 경지에 오른 듯한 조작 능력으로 매번 위기 상황을 모면했다.
◇위기탈출 넘버원, 법꾸라지 김기춘의 ‘결정적 장면 1’
제6공화국 법무부 장관 재직 시절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이 일어나면서 노태우 정권은 최대 위기에 내몰렸다.
노태우 정권은 6월 항쟁 시기 국민의 요구로 만들어졌던 개혁조치들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학생들의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노태우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김 전 비서실장은 이 국면에서 자신의 장기인 ‘프레임 뒤집기’ 능력을 발휘해 정권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1991년 5월 5일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라는 글을 기고하고 “학생운동권이 ‘기획 분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고 있다” 주장했다.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루카 신부도 “분신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 전 실장은 “김지하와 박홍 신부의 말이 근거 있다”며 검찰에 특별 수사를 지시했다. 이후 수사과정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켜 사태를 완전히 뒤집었다. “재야단체 전민련 소속 운동권 학생인 강기훈이 운동권 동지였던 김기설의 분신자살을 부추기고 유서까지 대필해 줬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정부가 이러한 수사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 분신정국은 급속히 공안정국으로 반전됐다. 이후 1991년 6월 4일에는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 한국외대 교수가 퇴임식에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당하면서 운동권은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위기탈출 넘버원, 법꾸라지 김기춘의 ‘결정적 장면 2’
김 전 실장은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최대 위기에 몰렸지만 극적인 '프레임 뒤집기'로 되살아났다.
그는 1992년 12월 11일 복어요리집인 초원복집에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했다.
김 전 실장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되면 영도 다리에 빠져죽자” “지역감정이 유치할진 몰라도 고향 발전엔 도움이 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등등의 노골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이 사실은 대선 경쟁자였던 정주영 당시 통일국민당 후보 측에서 도청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프레임 뒤집기로 전세가 반전됐다.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 측은 거꾸로 정주영 후보 측의 도청을 문제 삼았다. 사건의 쟁점은 ‘여론 조작’에서 ‘불법 도청’으로 빠르게 전환됐다. 부산 민심은 김영삼 후보에게 기울었다.
김 전 비서실장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됐지만 풍부한 법률 지식을 활용해 또다시 위기에서 탈출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를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되자 해당 법조항을 전복시키는 기발한 수를 썼다.
문제가 된 대통령선거법 규정을 위헌제청신청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초원복집 사건이 발생한 당시 자신이 공직에서 퇴임한 일반인 신분이었음을 강조하며 현행 대통령 선거법이 일반 시민의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법조계는 이에 대통령선거법에 대해 ‘일반 국민의 선거운동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려줬다. 김 전 실장은 결정적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