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박근혜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박근혜정부 정책에 대한 형법상 범죄가 인정된 첫 판결이다. 재판부는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집행을 ‘부당한 일’로 판단하고 직권남용죄를 인정했다. 다만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회 위증죄만 적용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27일 서울 서초동 청사 311호 중법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징역 2년,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에게 징역 1년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김소영 전 청와대 교육문화체육비서관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조 전 장관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 등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집행한 행위를 직권남용으로 판단했다. 정부 정책에 형법상 범죄가 인정됐다. 이 판결은 앞으로 다가올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선고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에 대해 “오랜 공직 경험을 가진 법조인이고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으로서 누구보다 법치주의를 수호하고 적법한 절차를 준수할 임무가 있음에도 문화예술계 배제 범행을 가장 정점에서 지시했고, 그 실행 계획을 승인했으며 때로는 독려하기도 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강요 혐의에 대해선 “형법상 협박으로 판단할 명시적‧묵시적 행위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또 “피고인은 다수의 훈장을 받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됐으며 고령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점을 참작했다”며 양향 사유를 밝혔다.
박근혜정부는 문화계 인사‧단체의 정치적 견해와 성향을 구분해 목록화한 문건,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A4 용지 100장 분량에 9473명의 이름이 이 문건에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정부에서 문화계 국가보조금 지급 대상과 규모는 이 문건을 바탕으로 결정됐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이 문건의 작성과 집행 과정에서 보고체계의 최상위에 있던 박근혜정부 핵심 인사들이다.
피고인 측 변호인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 2월 첫 공판준비기일부터 5개월 동안 36차례 공판에서 이 문건의 성격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정책’을 주장했던 반면, 특검은 ‘차별’을 강조했다. 특검은 지난 3일 결심 공판에서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장 등 통치행위상 상정할 수 있는 국가 최고 권력을 남용한 것으로, (블랙리스트 집행에) 소극적인 공무원들을 좌천시키는 등 졸렬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합헌적 절차를 모두 생략했다”며 김 전 실장에게 징역 7년, 조 전 장관에게 징역 6년을 각각 구형했다.
재판부는 그동안 ‘블랙리스트에 대한 보고조차 받은 적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던 조 전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정 전 1차관이 일관되게 ‘조 전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증언을 종합하면 피고인이 장관으로 부임하고 비서관들의 보고를 통해 (문화계) 지원 배제 행위를 알고 승인한 것으로 보기에 부족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조 전 장관이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위증한 혐의에 대해 “개인이 아닌 문체부 차원의 대응으로 보이지만 피고인은 장관으로서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조 전 장관은 형 집행이 유예되면서 석방됐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