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심각한 근육 통증 호소하는 고등학생

입력 2017-07-23 12:27
이호분 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마음 속 갈등이나 어려움을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를 신체적인 증상 즉,두통이나 복통,가슴 답답함,근육의 통증 등으로 표현한다. ‘신체화 장애’ 라고 한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이나 불안감, 억울함들의 감정보다는 ‘몸이 아픈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훨씬 잘 받아들여지거나 이해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체 증상에 대한 온갖 검사를 해봐도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증상도 호전이 되지 않는 기간이 지속되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지쳐가게 된다.

P(가명)는 고1 남학생이다. 다리의 근육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통증 클리닉 선생님의 권유로 정신과에 내원했다. 알고 보니 근육의 통증 뿐 아니라 때로는 가슴이 답답하며 숨쉬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P는 원래 공부 잘하고 성실하고 얌전해 말썽 한번 부리지 않았던 아이였다. 하지만 고입 후 신체적인 증상이 생기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고통을 위해 밤낮 컴퓨터 게임에 매달렸다.

한창 공부해야 할 때 이런 행동을 하는 P를 부모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야단을 칠수록 컴퓨터에 대한 집착은 강해져 부모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성적도 점점 더 떨어져갔다.

가족을 상담하다보니 P의 엄마도 P와 유사한 가슴이 답답하다는 증상이 있어서 P가 어려서부터 고생을 해오고 있었다. P의 아빠는 아주 권위적이고 보수적이어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절대로 가족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에서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아빠는 이렇게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서 공부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하는 아이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전업주부면서도 집안 살림도 완벽하게 못하는 아내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빠 앞에서 P나 엄마는 늘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P는 나름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고 비난만 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는 아빠 앞에서 주눅 든 아이가 안쓰럽고 안타까웠지만 아빠는 엄마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엄마 또한 아빠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로 우울한 상태여서 P의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차릴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체화 장애’가 유독 많은 이유는 감정을 자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언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가정이 많다. ‘그런 말 하면 못써’라고 하면서 감정을 억압하거나 아이의 분노나 억울함을 위로하려고만 하면서 감정을 회피하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많다. 

P의 아빠는 감정을 억압하는, 엄마는 감정을 회피하는 부모였던 거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정서적인 반응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부모가 보여줘야 한다. 부모 자신도 원인 없는 신체적인 증상이 있다면 ‘여기 저기 아프다’는 것을 습관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자신의 억압된 감정이 무엇이며 이를 표현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부모나 집안 어른들의 감정 표현 방식은 아이들이 무섭도록 쉽게 학습하기 때문이다. 

또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어려서부터 이 마음을 부모가 언어적으로 읽어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감정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자존감의 시작은 자기 감정의 소중함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호분(연세 누리 정신과 의원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