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빙 결함을 알고도 무리하게 전력화를 추진한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 비리 의혹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찌감치 보고받았지만 이를 묵인했다는 주장이 18일 제기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감사원에서 제출받은 '대통령 수시보고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 같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감사원이 박근혜정부에서 대통령에게 수시로 보고한 내역 중 지난해 8월 12일 '군수장비 획득 및 운용관련 비리 기동점검' 결과가 포함돼 있었다. 수리온의 엔진·전방유리(윈드실드) 결함도 그 중 하나였다. 정성호 의원 측은 "두 달 뒤인 10월 20일 감사위원회에서 감사 결과가 최종 의결됐고 11월 22일 감사 결과가 공개됐는데, 당시 감사원은 수리온 결함 내용을 공개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주장했다.
감사원은 이에 대해 "지난해 수리온 감사 과정에서 결함이 발견돼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 이번에 발표한 것은 추가 조사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정 의원에게 해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 의원은 "작년 11월 22일 공개된 보고서와 지난 17일 발표된 감사 결과 보고서는 동일한 문건이다. 최종 의결 날짜도 10월 20일로 동일하다"며 "당시 박 전 대통령에게 수리온 결함에 대한 보고가 전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감사원이 대통령에게 수시보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배경에 대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수리온 비리를 1년간 은폐·방치한 감사원도 진상규명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 '수리온' 비리 의혹
감사원은 지난 16일 방위사업청이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의 결빙 결함을 확인하고도 무리하게 전력화를 추진했다며 방사청에 수리온 전력화 절차를 중단하도록 통보하고, 장명진 방위사업청장 등 관계자들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수리온은 혹한기 결빙에 따른 엔진 정지로 2015년 한 해에만 세 차례나 사고가 났다. 결빙 문제로만 218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2015년 12월에는 수리온 한 대가 추락해 완파되기도 했다.
2015년 10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미국 미시건주에서 진행된 수리온 결빙성능시험 결과 엔진 공기흡입구과 냉각 덕트(공조기)에 기준 이상의 얼음이 끼는 등 101개 항목 중 29개 항목이 기준에 미달했다. 방사청은 시험 결과에 따라 지난해 8월 수리온 납품을 중단토록 결정했다. 하지만 중단 4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돌연 납품을 재개했다. ‘겨울철 운용에 문제가 없다’는 이유였다.
감사원은 납품 재개 과정에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별다른 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방사청이 장 청장 승인 하에 납품 재개를 결정했다는 취지다. 감사원은 수리온 전력화 업무 담당자 2명을 징계(강등)하도록 장 청장에 요구했다. 또 수리온 결빙 문제가 보완될 때까지 전력화를 중단하고 KAI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통보했다. 감사원은 장 청장과 이상명 한국형헬기사업단장 등 3명을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대검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 "문제없다" 강변했던 방사청장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은 육군의 노후 헬기인 UH-1H와 500MD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2006년 개발이 시작돼 총 사업비 1조3000억원이 투입됐으며 2012년 12월 실전 배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배치 직후부터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설계 결함으로 프로펠러와 전방유리가 파손되는가 하면 동체에 금이 가거나 빗물이 새는 일도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겨울철 엔진 결빙이었다. 2015년 1월과 2월 육군항공학교가 운용하던 수리온 2대가 엔진이 멈춰 비상착륙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의뢰를 받은 미국 업체는 “겨울철이 오기 전 최대한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통보했지만 육군항공학교와 육군군수사령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그해 12월 수리온 한 대가 추락해 완파되고 말았다.
감사원 감사 결과 엔진 결빙 문제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도외시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9년 1월 방사청은 막연히 사업 일정 등을 이유로 결빙시험을 미뤘고 시험평가 기간(2009년 9월~2012년 4월)에도 실시하지 않았다. 방사청은 ‘결빙시험을 해외시설에서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2012년 7월 ‘기준 충족’ 판정을 내렸고 그해 12월 수리온을 납품받아 전력화를 시작했다.
방사청의 이런 태도는 미국 결빙 성능시험(2015년 10월~2016년 3월)에서 ‘기준 미달’이 나온 뒤에도 계속됐다. 방사청은 시험 결과가 공개된 지난해 9월 입장자료에서 “설계보완과 추가입증 등 후속 조치를 검토 중이며, 착수 후 1년6개월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고작 4개월 뒤인 지난해 12월에 납품 재개 결정을 내렸다. “노후헬기 도태에 따른 전력 공백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감사원은 16일 “방사청은 수리온의 결빙 성능이 보완돼 ‘국방규격’을 충족할 때까지 납품을 수락해선 안 됐다”면서 “성능이 규격을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수리온을 계속 전력화함으로써 비행 안전성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됐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기존 전력화된 수리온의 개선비용 207억원을 정부가 부담할 가능성이 있는 등 국가재정에도 손해를 초래했다”고도 했다.
장명진 방사청장은 2015년 2월 국회에 나와 여러 방위사업 가운데 한국형 헬기사업단을 가장 성공적인 사업단으로 꼽았었다. 수리온의 조립·생산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방위사업청은 “한국 지형에서의 운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러 차례 항변했다. 이러한 입장의 배경에 수리온 개발을 둘러싼 금전적 부당이익이 있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 하성용 대표 취임 후 수상했던 KAI
수사에 착수한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부장검사 박찬호)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차장급 직원이 무기 개발 외주용역을 친인척 회사에 대거 몰아준 뒤 잠적해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KAI 인사운영팀 S씨는 2007년 11월 컴퓨터 수리·판매 업체를 운영하던 처남 명의로 설계 용역회사인 A사를 차려두고 200억원대를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 경공격기 FA-50 등의 개발과 관련해 용역 회사 선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A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식으로 2014년까지 용역비 247억원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앞서 감사원 감사에도 포착됐다. 2015년 감사원은 S씨가 직원들의 용역비 단가를 부풀린 뒤 차액을 가로챘다는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단순 서무 직원이 설계감리 업무를 처리한 것처럼 둔갑시켜 기존 월급보다 큰 월 750만~800만원을 지급하고 제3자 계좌로 차액을 돌려받는 식이었다. 그는 A사가 전문 도급업체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서비스업/도급(항공기/자동차 설계)’이라는 식으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2013년 말에는 장인 명의로 용역업체 B사를 추가 설립, KAI의 용역업체로 두고 2014년부터 똑같이 일감을 받았다.
검찰은 S씨의 횡령·배임 규모에 비춰 윗선의 묵인·방조 등 조직적인 비위까지 의심한다. 특히 2012년 초 방위사업청 사업감사담당관실이 KAI 외주용역비가 부풀려진 의혹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방사청 원가회계검증단 등에 통보했으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주목하고 있다. S씨의 범행 기간 하성용 KAI 대표는 경영관리본부장,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을 역임했다. 일각에선 S씨 모친이 하 대표와 종친이란 얘기도 나온다.
검찰은 하 대표 취임 이후 세워진 T사, 그리고 이곳과 연계된 Y사 등 KAI의 협력업체 2곳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T사는 KAI의 기존 협력업체 W사의 직원들이 푼돈을 모아 자본금을 납입해 세운 회사로, 설립 과정에 KAI가 관여했다. 애초 W사는 수리온 헬기의 ‘상태감시장비(HUMS)' 등 항전 장비를 만들고 국산화 업무협약까지 체결했던 KAI의 주요 협력업체였다. 그런데 적대적 인수·합병(M&A)에 시달려 부도 위기를 맞아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직원들이 모은 자본금 1억원은 금방 바닥났고, W사 기술이 절실했던 KAI 측은 하 대표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 대표와 함께 일한 이력이 있는 A씨(62), 항공기 부품업체 Y사를 운영하며 장기간 KAI와 협력 관계를 맺어온 B씨(59) 등에게 지분투자를 요청한 것이다. 1억원을 낸 A씨가 대표이사직을 맡아 T사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었다.
신용평가업계에 따르면 현재 T사의 판매처 중 KAI의 비중은 60.69%다. T사 경영에 관여하기 전 B씨가 운영하던 Y사 역시 KAI에 생산품의 85.09%를 납품한다. T사와 Y사 실적은 2013년 이후 상승세다. 검찰은 T사와 Y사의 돈이 하 대표 측으로 흘러간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B씨는 “그동안 해외에서 골프도 한 번 치지 않은 삶이었다”며 “단 한 점 부끄럽게 살아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