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구례군노인전문요양원 옆 시멘트길을 오르더니 이내 멈췄다. 이제부터 산길 등산을 해야 한다. 하 관장이 등산화를 여몄다. 멀리 섬진강이 보였다. 구례군 토지면 면사무소와 토지교회도 보였다.
해발 200여m에서 시작된 산행이었다.
먹구름은 여전했고 연일 내린 비로 땅은 푹신했다. 곳곳에 휩쓸린 나뭇가지와 물길이 갈 길을 더디게 했다. 하 관장은 왕시루봉 선교유적지까지 2시간~2시간반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오로지 그와 둘뿐이다. 산은 점점 하늘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다.
하 관장은 지리산 왕시루봉(해발 1240m)에서 선교유적지를 지키며 6년째 산속에서 홀로 산다. 그의 삶이 신비하다. 왕시루봉 유적지는 지면 등을 통해 본 것이 전부였다. 규모나 환경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산행 20~30분이 지나자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소설 ‘이즈의 무희’ 주인공 같은 여유로운 여행일 것이란 환상이 깨졌다. 땀이 비오듯 했다.
“선교사님들을 신앙인으로 보기 전에 한 인간으로 보자면 참 짠한 분들이에요. 이 멀리 가난한 나라까지 와서 풍토병을 피해 깊은 산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니 말이죠. 제 아무리 지리산 자연을 즐긴다 하더라도 제 나라만 했을까요. 고향과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겠어요.”
앞서 가던 하 관장이 혼자말처럼 얘기했다.
“조선 땅 온 선교사님들 짠 해”
1885년 언더우드 등 서구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이들이 미지의 조선 땅에 들어왔다.
‘서울의 성문은 오후 7시에 닫힌다. 여기서(제물포) 성문까지 27마일이나 되며, 가마로 8시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1890년 10월 13일 여선교사 로제타 홀의 일기 중)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8시에 출발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게일(캐나다 선교사)씨가 가마와 가마꾼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가마를 운행하는 데는 여덟 명의 남자가 필요하다. 네 명이 한 동안 운반한 다음 다른 네 명이 교대를 한다.
보통 관료(조선 양반)들은 네 명만 부리지만 가마꾼들은 외국인들로부터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한다.…(조선에) 바퀴달린 운송수단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게일씨는 조랑말을 타고 가고 있다.…한강에 도착하기까지 한참 동안 우리는 꽤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마치 사막을 지나는 듯 했다.’(10월 14일 일기 중)
로제타 홀(1865~1951)은 미국 펜실베니아여자의대를 졸업한 의료선교사였다. 남편 월리엄 홀과 딸 마가렛 홀을 한국에서 잃었다. 부녀는 지금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묻혀 있다. 게일도 아내를 잃었으나 그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급성장하는 교회를 돌봐야 했다.
전킨 선교사는 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뛰다 급성 폐렴으로 죽었다. 미국 출신인 그는 군산 영명학교, 전주 기전여학교 등을 세우며 복음을 전했다. 코이트 선교사는 두 살, 네 살 자녀를 이틀 간격으로 잃었다. 이질과 같은 풍토병이 원인이었다. 그렇게 숨진 선교사와 그 자녀들이 67명이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문명화되지 않은 땅임에 분명했다. 신분질서에 의한 비인권 사회였고 무당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들에게 조선 땅은 모험이었고, 사명이었다.
132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전세계 172개국에 2만72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오지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최대 위험 요소는 위생과 건강이다.
1921년 열악한 환경에 처한 서구의 선교사들은 건강을 지키고 영적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격리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지리산 노고단에 수양관을 설립한다. 황해도 소래(1905·미 북장로회), 함경도 원산(1914·감리회)에 이은 수양관으로 미 남장로회 주도였다.
이 노고단 수양관 권역은 1930년대까지 60여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노고단 일대가 도쿄제국대학 부지였고, 그들과 10년 임대계약을 맺어 건립했다. 녹스 선교사는 ‘…숲 속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사색할 수 있으며 마음에 끌리는 대로 캠프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선교사들에겐 풍토병에 대한 항체가 부족했다. 따라서 800m 이상 고도 지역이 병원균 서식이 어려웠으므로 격리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여름철 휴양공간으로도 사용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초교파적인 선교사업을 논의했고, 레이놀즈 선교사 같은 이는 한글 신약성경 개역작업을 이곳에서 진행했다.
동시에 노고단 수양관은 조선팔도에 흩어진 선교사들이 휴가 기간 모여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편 노고단 수양관 건립은 순전히 조선인 노동력으로 이뤄졌다. 지게에 건축자재를 져 날라야했다. 응당 임금이 지급됐다. 증언 자료에 따르면 ‘셰르파’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뒷돈을 낼 정도였다고 한다. 오후 2시가 넘으면 20~30%의 임금을 더 주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경관 속 12채의 교회와 오두막
산에 오르던 하 관장이 말했다. “좀 이해가 안 되죠. 외국 선교사가 가마나 조랑말을 타고 이동하는 옛날 사진을 보고 요즘 사람들은 착취로 이해하니 말이죠. 시대 상황과 시대적 배경을 알면 폄하할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 선교사님들이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에 가서 고생하시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될 일 아닌가요.”
비를 뚫고 왕시루봉 콘센트건물교회에 도착해 기도를 했다. 6·25전쟁 직후 미군 물자로 지은 교회였다. 강대상 뒤 석벽에 백석(白石) 십자가를 박았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12채의 수양관 가옥이 숲 속에 흩어져 있다. 미국 영국 호주 노르웨이 심지어 일본풍 가옥도 있다. 산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드러난 숲 속의 오두막 풍경은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왕시루봉 교회와 오두막은 1962년 전후로 완공됐다. 노고단 수양관이 일제에 의해 폐쇄되고, 6·25전쟁에 무너진 이후였다.
“1935년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총독부와 남장로회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또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1940년 11월 대부분의 선교사가 미국 정부가 보낸 마리포사호를 타고 귀국하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노고단 수양관도 폐쇄됐어요. 그리고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분류돼 국가 소유가 됩니다. 대체 수양관이 필요했죠.”
지난 11일 만난 오정희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상임이사의 설명이다.
기독교사학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노고단 수양관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익 빨치산의 근거지가 됐고 휴전 후까지 빨치산 소탕작전이 이어지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다”며 “이 과정에서 수양관 건물과 주변 환경은 철저히 파괴됐다”고 밝혔다.
왕시루봉 수양관은 전쟁 직후 선교지로 되돌아온 린튼과 하퍼 선교사 등이 여러 검토 끝에 최적지로 보고 건축에 나섰다. 구례 토지교회를 베이스캠프 삼아 자재를 날랐다. 토지면민에게 몇 년간의 공사는 좋은 일자리이기도 했다.
그러한 수양관은 2003년 사용목적인 ‘난치병 환자 치료 및 요양’에 위배 된다는 이유로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에 한국교계가 보존위원회를 조직해 지켜냈다. 이제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국가가 보존하고 교계가 위탁 관리하는 방안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2013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꼭 지켜야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교계가 지리산 선교유적지 보존을 두고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이제는 세계의 유산이거든요. 12채의 교회와 오두막이 살아남은 것 자체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하 관장이 산불과 태풍 속에서도 건재한 유적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지리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전정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