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남부지방에 깜짝 무더위가 찾아왔다. 오후 2시 현재 경북 경주는 37도, 포항은 35.8도, 대구는 35.4도까지 수은주가 치솟았다. 동해안도 대부분의 지역이 30도를 웃돌아 최근 일제히 개장한 해수욕장 49곳에 피서객이 붐볐다. 전날 장맛비로 한산했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같은 시각 서울과 수도권에는 잔뜩 흐린 하늘에서 수시로 비가 내렸다. 기상청은 이날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새벽부터 서울·경기·강원영서·충청 지방에 80∼50㎜의 비가 올 것으로 예보했다. 특히 서울과 경기도는 최고 200㎜의 많은 비가 내리는 곳도 있겠다고 밝혔다.
한쪽에선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다른 쪽에선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씨. 장마전선의 오르내림에 따라 거센 빗줄기와 불면의 열대야가 엇갈리는 현상이 올여름에도 찾아왔다. 기후변화 여파로 추정되는 장마전선의 빈번한 '남북 진동'에 한반도는 최근 몇 년째 '두 얼굴의 여름'을 겪고 있다.
◇ 장마 속 폭염… 무더운 한반도
동해안 지역이 장마전선의 영향에서 벗어난 9일 개장 후 첫 휴일을 맞은 각 해수욕장에선 많은 피서객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물놀이를 하며 여름을 즐겼다. 전날은 장맛비로 비교적 한산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날은 동해안 대부분 지역에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찾아와 백사장은 피서객으로 빼곡했다. 강원도는 동해안 해수욕장에 이날만 약 10만명이 방문한 것으로 추산했다.
제주도 역시 전역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를 보였다. 이호·협재·함덕 등 유명 해변이 북적이고, 보양식 등을 파는 해변 간이음식점도 대목을 맞았다. 영일대, 구룡포·월포 등 경북 포항에서도 일찌감치 개장한 해수욕장마다 피서객들로 붐볐다. 낮 최고기온이 31도를 기록한 밀양에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과 얼음물 계곡에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몰려들었다.
일부 지역은 이미 열대야를 겪고 있다. 올해 열대야는 지난달 30일 강원 강릉과 경북 포항·영덕·영천 등에서 처음 발생했다. 열대야는 전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최저기온이 25도 이상 유지되는 현상을 말한다. 올해 첫 발생일 당시 강릉과 포항은 26.6도, 영덕과 영천은 각각 25.5도, 25.0도였다.
포항은 첫 발생일 이후 사흘 내리 열대야가 이어졌고, 제주는 이달 2일부터 나흘 연속 열대야 현상이 나타났다. 올해 열대야는 관측 이래 가장 일렀던 2014년 5월 29일(강릉)을 제외하면 최근 5년과 비교해 다소 일찍 시작됐다. 지난해 열대야 첫 발생일은 7월 1일(포항)이었고, 2015년에는 7월 10일(서울·인천·목포·정읍)이었다.
기상청 관계자는 "본격적인 열대야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본격적으로 확장하는 7월 말에 시작할 것"이라면서도 "최근 남서풍이 계속 유입되고 있어 기온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은 작년 7월 22일 첫 열대야가 시작돼 8월 24일까지 총 33일이나 벌어졌다. 이 기간 열대야가 없던 날은 7월 29일과 8월 3일 단 이틀뿐이었다.
◇ 한 번 오면 장대비… 게릴라 장마
올해 장마는 평년보다 늦게 시작됐다. 하지만 일단 비가 오면 한꺼번에 엄청난 양이 쏟아진다. 기상청은 이번 장맛비가 지역을 수시로 옮겨 다니며 많은 비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게릴라성 호우'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장마는 한 박자 늦게 힘을 쓰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6월 24일에 처음 장맛비가 내려 평년보다 4∼5일 늦게 장마가 시작됐다. 남부지방은 29일, 중부지방은 7월 1일에 처음 비가 내려 평년보다 6∼7일 늦었다. 장마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제때 올라왔어야 할 북태평양 고기압이 제주 남쪽 먼바다에 한동안 정체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상청 관계자는 "장마가 늦어진다고 할 때만 해도 북태평양 고기압이 약한 거 아닌가 하는 말도 나왔지만, 최근 호우를 보면 알 수 있듯 실제 힘은 약하지 않았다"며 "다만 장마전선 북쪽에서 내리누르는 힘이 강했던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장마가 찾아와야 할 6월 하순에 몽골 쪽 지면이 이례적으로 엄청나게 가열됐다. 이 가열된 곳에서 풍선이 부풀 듯 커다란 고기압이 발생하며 우리나라 방향으로 세력을 떨쳤다"고 덧붙였다.
몽골에서 발생한 고온건조한 고기압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힘을 가해 북태평양 고기압을 제자리걸음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몽골 쪽에서 시작한 고기압이 동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장마가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며 "동쪽으로 간 고기압은 일본 규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장마전선과 부딪히며 엄청난 비를 뿌렸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의 아사쿠라(朝倉)시에는 오후 8시40분까지 24시간 동안 513㎜의 기록적인 물폭탄이 쏟아져 2만1000세대, 5만4000명이 대피해야 했다.
◇ 올해도 찾아온 '두 얼굴의 여름'
이런 장마전선이 7월 들어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전선의 영향을 받는 지역은 폭우에 가까운 강수량을 기록하고, 영향에서 벗어난 곳은 금세 폭염에 휩싸이는 날씨가 반복되는 중이다.
8일에는 중부와 전북 지역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낮 12시 기준 누적 강수량은 경기 포천 221.0㎜, 강원 양구 197.5㎜, 강원 철원 180.5㎜, 충남 서산 88.5㎜, 전북 익산 71.5㎜ 등이었다. 이 호우특보가 간신히 해제된 8일 오후 2시 무렵 제주도에는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다. 폭염주의보는 이틀 이상 하루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효된다.
같은 날 한쪽에선 호우특보가, 다른 쪽에선 폭염특보가 발령되는 '양극화 날씨'는 최근 몇 년 새 되풀이돼 왔다. 2013년 제주도가 47일째 열대야를 기록한 8월 23일, 중부지방은 호우특보가 발령돼 지역에 따라 150㎜가 넘는 비가 쏟아진 반면, 남부지방은 찌는 듯한 무더위에 폭염특보가 내려졌다.
당시 '반쪽 장마'의 원인은 장마전선이 너무 홀쭉했기 때문이었다. 장마전선은 남쪽의 덥고 습한 공기와 북쪽의 차고 건조한 공기 사이에 생기는데 남과 북의 두 공기 덩어리 사이의 거리가 이례적으로 짧아 좁은 지역에 강한 장마전선이 생겼다. 여기에 남쪽에서 강한 수증기까지 유입돼 두 공기 덩어리가 만나는 좁은 지역에서 물폭탄이 떨어지곤 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