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이준익 감독 “청춘의 뜨거움, 아름다워” [인터뷰]

입력 2017-07-09 10:00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왜 쓸 데 없이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느냐고? 수십 년간 잊고 살았던 우리의 역사, 그걸 되새기는 건 미래를 위한 일이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이준익(58) 감독이 시대극의 장인(匠人)이라 칭송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훌륭한 연출이나 각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대하는 그의 진정어린 태도에는 시대에 대한 존중과 예의, 애정이 녹아있다.

신작 ‘박열’에서도 그의 신념은 선연히 전해진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비밀결사 흑도회를 조직해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박열(이제훈)의 삶을 스크린에 옮겼다. 전작 ‘동주’(2016)에서 동주(강하늘) 시인과 송몽규(박정민) 열사를 조명한 데 이어 다시 한 번 일본 제국주의를 정조준했다.

박열은 1923년 간토 대학살 당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일본 황태자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법정에 선 인물이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기 위해 사형 선고를 감수하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최희서)가 그와 함께 투쟁했다.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던 이 22세의 청년은 20년 전 이준익 감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영화 ‘아나키스트’(2000) 제작 준비 당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관련 서적을 찾아보던 중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인물을 결코 가볍게 그려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오랜 세월 가슴 속에 꽁꽁 묵혀 뒀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은 “‘동주’는 사실 ‘박열’을 만들기 위한 실험작이었다”고 털어놨다. “상업영화만 찍던 사람이 갑자기 5억짜리 저예산 흑백영화를 찍는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었죠. 하지만 스스로 의심했던 나 자신을 ‘동주’를 통해 검증해야 했어요. 거기서 배운 걸 ‘박열’에 적용시킨 거죠.”

지난해 2월 ‘동주’ 개봉 이후 곧바로 ‘박열’ 시나리오 각색에 들어갔다. 그렇게 꼬박 1년 만에 완성했다. “난 벌레, 일벌레(웃음).” 이번에도 제작비(26억원)는 최소화했다 “온전하게 그들 내면의 신념만 좇기 위해선 적은 예산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만든 조건대로 영화를 만들었죠. 거기까지가 내 역할이에요.”

이준익 감독은 “상업영화로 보기엔 적은 예산이다. 대단한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일반 관객의 기대에 어긋날까봐 염려되긴 했다”고 털어났다. 하지만 “애초에 찍으려 했던 이 영화의 본질에 가깝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든다”며 “악평이 나오면 그걸 참고해 다음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겠나”라고 웃었다.

그가 말하는 ‘본질’이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청춘의 뜨거움이다. “22세, 질풍노도와 같은 청춘의 시기에 제국주의의 중심인 도쿄 대법원까지 목숨을 걸고 달려간 두 사람의 순열한 신념과 정신. 그게 바로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거였죠. 그토록 뜨겁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내는 모습이 난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해.”

이준익 감독은 “‘박열’은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부당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꼬집는 것이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고. 그는 “항일 프레임에 갇히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서로 감정의 벽만 쌓이게 된다”며 “감정을 억누르고 논리적·이성적으로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주’ ‘박열’과 비슷한 방향으로 구상한 작품은 무수히 많아요.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고 실력이 부족해서 찍지 못하는 게 많죠. 좀 더 실력을 쌓아서 그런 소중한 이야기들을 찍기 바랄 뿐이에요. 어차피 죽을 때까지 할 거니까…. 난 거시적인 목표는 없어요. 그냥 눈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 해치울 뿐이지(웃음).”

이준익 감독과 함께 일해 본 배우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감독님이 불러주시면 언제든 달려가겠다” “언젠가 꼭 다시 작업하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박열’의 이제훈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감독님에게 기대어 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인간적인 매력이 매료된 것이다. 그에겐 대체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이준익 감독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들어 설명했다. 사회 구성원간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나키즘 이론이다. “영화는 감독의 권력으로 찍는 게 아니에요. 배우의 독선으로 찍는 것도 아니고요. 감독과 배우가 서로 의지하면서 찍는 거죠. 나는 (이)제훈이한테 의지했고, 제훈이도 나한테 의지한 거예요.”

이준익 감독은 “감독이 작품을 10편 이상 찍으면 (타고난) 재능은 거의 바닥이 났다고 보면 된다”며 “그때부터는 같이 일하는 배우·스태프에게 의지해서 찍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이어 “난 그들에게 어떠한 요구나 주장을 하지 않는다”며 “지나간 지식과 경험으로 오늘의 상황을 단정 짓는 건 억압이자 폭력”이라고 했다.

“나이 차? 뭐 100살 차이도 안 나는 걸 난 나이 차라고 생각 안 해요. 나보다 어린 사람을 봐도 그가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죠. 이 세상에 나온 온전한 한 인간일 뿐이에요. 그의 잠재된 가치를 들여다보고 인정해주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죠. 어리다고 ‘네가 뭘 알아?’ 웃기고 있네. 나이 먹은 게 더 몰라요(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