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및 대북 구상을 밝힐 때 독일을 주로 활용해왔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역사적 통일을 이룩한 독일을 교훈삼아 국제사회와 북한에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통령들의 메시지는 북한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남북 화해‧협력 및 당국 간 대화채널 복원에 방점을 찍은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포기를 전제로 한 남북협력과 흡수통일론에 주안점을 뒀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성사된 1·2차 남북정상선언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다만 독일 방문 직전 터진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관련해 핵 도발 전면 중단을 촉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베를린 선언’(2000년 3월 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9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문제’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여기서 발표한 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화해·협력선언’(베를린 선언)이다.
김 전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며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특히 “우리의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 냉전 종식과 평화 정착”이라고 밝혀 ‘흡수통일’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민간 교류와 남북 간 특사 교환을 통한 대화의 중요성도 피력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은 무엇보다도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적극 응해야 한다”고 했고, “이러한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 당국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북한이 남북 특사 교환 제의를 수락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베를린 선언은 3개월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이정표로 평가된다. 북한이 주요내용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베를린 선언은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의 산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 ‘베를린 제안’(2011년 5월 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 5월 9일 베를린 총리 공관에서 열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깜짝 제안을 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이듬해 3월 서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 대통령의 초청 제안에는 전제가 붙었다. 북한이 핵 포기 의사를 국제사회에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또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도 내걸었다.
이 제안은 즉각 북한의 반발을 불러왔다.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핵 포기를 대화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미국과 함께 북침야망을 실현해보려는 가소로운 망동”이라고 비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을 방문하고, 동포간담회에서도 “남북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밝히는 등 ‘통일 메시지’를 쏟아냈다. 하지만 ‘선언’이나 ‘구상’이라 부를만한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정치적 메시지를 제시하는 데 그쳤다.
◇박근혜 전 대통령 ‘드레스덴 구상’(2014년 3월 28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3월 28일 독일 드레스덴 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드레스덴 구상)을 발표한다. 그해 1월 신년사에서 박 전 대통령이 언급한 ‘통일 대박론’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드레스덴 구상은 남북한 주민들의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공동구축,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 등 3대 기조를 통해 낮은 단계의 신뢰 구축방안을 제안했다.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유엔과 함께 산모와 유아에게 영양과 보건을 지원하는 ‘모자패키지 사업’ 등의 인도적 문제 해결, 복합농촌단지 조성 등을 포함한 남북 공동번영 민생 인프라 구축 등을 북한에 제안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러나 높은 단계의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처럼 ‘흡수통일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연설문 내용 가운데 “핵을 포기해 진정 주민들의 삶을 돌보길 바란다”는 내용은 북한을 자극했다.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다. 드레스덴 구상 발표 2주 뒤 북한은 국방위원회 담화를 통해 “흡수통일의 나라 독일에서 구상을 발표한 것만 봐도 불순한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맹비난했다.
◇문재인 대통령 ‘뉴 베를린 선언’(2017년 7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일 베를린 옛 시청에서 열린 쾨르버 재단 초청연설을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한 한반도 평화구상(‘뉴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뉴 베를린 선언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이뤄낸 1·2차 남북정상선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고,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 체제안전을 보장하는 비핵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한 비정치적 교류협력사업 등 5대 원칙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구상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교류를 북한에 제안했다. 10·4 정상선언 10주년이자 추석연휴인 오는 10월 4일 이산가족 상봉 및 성묘 허용,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휴전협정 64주년인 오는 27일을 기해 군사분계선에서 상호적대행위 중단, 남북대화 재개 등이다. 문 대통령은 “여건이 갖춰지고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국면을 전환시킬 계기가 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이런 제안이 북한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ICBM 도발과 관련해 “무모한 선택”이라며 “북한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