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수가 거론한 신사참배 거부 목회자는 한상동 주기철 조수옥 등이다. 경남 마산(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일대에서 청년기 신앙생활은 한 이 교수는 국민일보가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아 연재하고 있는 '한국기독역사여행' 시리즈의 '조수옥 전도사'(2017년 6월 3일자 18면)편을 읽고 친필의 편지를 해당 기자에게 보냈다.
국민일보는 이 교수의 사신이긴 하나 한국교회사의 사료로 판단해 이를 공개한다.
한편 이 교수는 '세계교회사 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 그리고 '혜암신학연구소' 활동 등을 통해 신학적 지평을 높인 원로 신학자다. 90세 초반까지 혜암신학연구소를 이끌어온 이 교수는 최근 경기도 화성시 기독교요양시설 광명의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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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 국민일보 논설위원님께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저는 한신대 은퇴목사 이장식입니다. 2017년 6월 3일자 국민일보 미션지에 쓰신 위원님의 글을 읽고 근 한 세기를 다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글을 감명 깊게 읽고 appreciation(감탄)하면서 저의 지난날 살아온 때와 고장의 일들 중에서 이제 저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일들과 또 몰랐던 일까지도 알게 해 주셔서 감명 깊게 읽고 부질 없이 이 글을 써 드립니다. 양해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수옥 전도사님의 신앙투쟁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는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일이면서 그 분과 뜻을 같이 하신 분들로서 저와 상관되는 분들의 옛 이야기가 상기 됩니다.
한상동 목사님과 부산 수영해수욕장에서 비밀집회를 가지신 분 중의 윤술용 목사님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으로 듣습니다.
윤 목사님은 진해 덕산리에서 저와는 앞 뒷집에 같이 살던 형제나 부모와 같으신 분이며 나를 신앙으로 또 신학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홀로 사신 어머님을 도와서 늘 힘이 되어 주신 분입니다.
윤 목사님도 일제시대 밀양에서 목회하시면서 늘 경찰서에 불려가서 고초를 당하셨구요.
그리고 조수옥 전도사님은 출옥 후 아마 재건파에 속하신 분이 아닌가요? 잘 모르지만 최덕지 전도사님과 행동을 같이 하신 줄 생각합니다만, 진해 경화동 저 모교회 목사님으로서 저의 신앙의 아버지되시고 호주선교회 장학금을 얻어서 저가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공부하게 해주신 은인이신데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교회 목회를 사임하시고 마산으로 가셔서 건어물을 사서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시다가 해방 후 재건파를 세우시고 외롭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재건파 교인들은 다른 교인들과 심지어 가족끼리도 상존을 안한 분들이었지요. 제가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와서 마산에 은거하시던 강 목사님의 사택을 찾아 갔을 때 기쁘게 나를 맞아주셨지요.
경화동교회에서 같이 자라 온 홍반석 형의 이야기도 있지요. 어릴 적에 서로 헤어진지 약 30년이 지나서 서울의 아카데미하우스의 어느 회합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는 고신대 교수였고 나는 한신대 교수였지요.
그의 부인이 재건파에 속해서 홍 박사가 애를 먹었는데 심지어 한 솥의 밥을 먹지 않고 별도로 지은 밥을 먹었다지요.
저의 외가인 마산과 문창교회 이야기도 아울러 기억나는군요. 마산 출신으로 계성중학교 5년 동안 한 방에서 하숙한 최익우 군과 함께 마산 문창교회에 주일날 가서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일이나 마산 뒷산 무학산에 같이 올라가서 아래로 바다를 보던 일도 기억나는데 조 전도사님이 애양원(인애원의 착각인듯)을 세운 자리겠지요.
최익우는 중학교 시절부터 목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고 매일 아침 새벽기도하러 교회에 나간 친구였는데 중학교 졸업 후 헤어진지 약 30년이 지나서 그는 고신파 교회 총회장이 되었지요. 한번 만나서 반갑게 옛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삼천포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 전도사님이 삼천포 뒷산 깊은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하신 그 산이 와룡산이란 이름을 이제 알게 됐습니다. 제가 해방 후 신학교 재학 시절 삼천포 친구 이화선 박사(지금은 독일에서 살고 있는)의 집에 찾아가서 며칠 지나면서 뒷산 높고 산세가 좋다고 하여 그 친구가 나를 데리고 올라간 산이 어떤 산이었는지 몰랐는데 그 산이 와룡산이겠습니다.
제 아내가 경남여고 재학시절 부친이 삼천포법원에 계시던 때여서 가끔 삼천포 뒷산에 경치 좋은 곳에서 높았다고 하는데 그 산을 그는 ‘노산'이라고 기억하고 있네요.
한 때 아내가 병치료를 받던 의사가 삼천포교회 모 장로님이라고 합니다.
저는 근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제는 노쇠해서 하늘 일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옛 이야기를 가끔 기억하는 일만 하지요.
일제 말년 신앙 박해를 받아가면서 살아온 신앙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우리는 그것을 다 모르고 있어서 역사의 그늘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이런 일들을 한두가지 들추어 내서 기록해 주시는 분들이 고맙기만 하지요.
저는 서양교회사를 주로 공부해서 한국교회사 이야기는 많이 모릅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가 경남지방 선교 역사 책을 썼지요.
이 교수님과는 이따금 서울에서 학술발표회 때 만나기도 하고 저희 집에도 다녀 가기도 했지요.
앞으로도 계속 숨은 교회 역사 이야기를 많이 써서 감명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제는 얌전하게 글을 쓸 수도 없는 손가락이 되어서 이렇게 난필로 썼습니다. 용서하세요.
저의 이런 이야기는 제가 80세 때 쓴 자서전 ‘창파에 배띄우고'의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쳅터에서 자세하게 썼습니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