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개막한 연극 ‘대학살의 신’을 본 관객이라면 배우 이지하(47)가 궁금해질 것이다. 남경주 최정원 송일국과 함께 출연한 그는 대중적 인지도 면에서 떨어지지만 강렬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30일 서울 대학로의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대학살의 신’은 네 배우의 ‘합’이 잘 맞아야 하는 작품이다. 다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기 때문에 관객들이 재밌게 봐주는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통해 중산층의 위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베스트셀러 연극 ‘아트’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또다른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초연과 2012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다. 이지하는 이번에 예술을 사랑하며 아프리카의 인종분쟁 유혈사태에 대한 책을 저술하는 베로니크로 출연한다. 네 명의 캐릭터 가운데 가장 현실과 동떨어져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관객의 웃음을 자극한다.
“배역에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극중 인물처럼 말투가 바뀔만큼 일상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는데요. 베로니크는 관객들에겐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제겐 정말 진지한 인물입니다. 극중 캐릭터에 대한 그런 시선의 차이가 큰 웃음을 유발하는 것 같아요.”
그는 대학로에서 연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배우 배우로 손꼽힌다.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연출가 이윤택의 눈에 띄어 프로 배우가 됐다. 특히 극단 입단 직후인 1993년 이윤택의 대표작이기도 한 ‘바보각시’의 주역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바보각시’는 이윤택 선생님이 절 위해 만들어준 작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연기를 잘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제 안의 순수성, 맹목성, 낙천주의 등을 끄집어내 캐릭터를 만드셨다고 생각해요. 바보각시는 그냥 날것 자체의 제 자신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2년 가까이 ‘바보각시’를 중심으로 무대에 서면서 그는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을 느꼈다. 연극작업이 점점 힘들고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당시 어리고 인내심이 없던 내게 이윤택 선생님의 세계관이 멀게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성향 자체가 공동생활하는 극단의 작업방식과 잘 맞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무대를 떠난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1998년 회사를 쉬고 사진과 웹디자인을 배우고 있을 때 연희단거리패에서 함께 작업했던 연출가 김광보로부터 ‘종로 고양이’의 출연 제안을 받았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다시 극장에 온 그는 연극작업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오랜만에 연극을 해서인지 작업 과정 내내 재밌었다”면서 “그때 극장이 혜화동 일번지였는데, ‘종로 고양이’ 다음 작품을 준비중이던 연출가 이성열 선배를 만났다. 예전에 ‘바보각시’를 봤던 이 선배가 연극을 계속 할 거면 자신의 극단 백수광부로 오라고 말해줬고, 자연스럽게 연극에 돌아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연극계에 복귀한 그는 그동안 연간 평균 3~4편에 출연하며 대학로의 간판 여배우로 자리잡았다. ‘그린 벤치’(2005) ‘오레스테스의 시련’(2008) ‘억울한 여자’(2010) ‘과부들’(2012) 등으로 여러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된 연극들을 꼽으라면 ‘바보각시’ ‘그린 벤치’ ‘억울한 여자’ ‘과부들’입니다. ‘바보각시’에서 배우로서 가능성을 처음 보여줬다면 ‘그린 벤치’를 통해 배우로서 제대로 인정받은 것 같아요. 그리고 ‘억울한 여자’로는 관객의 사랑을 받고 소통하는 기쁨을 발견했고, ‘과부들’에서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배우의 사회적 역할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됐습니다.”
영화산업이 커지고 종편 채널 드라마가 많아지면서 많은 연극배우들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아무래도 수입 면에서 월등한 영화와 드라마를 우선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무대에 서는 기회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최근 연극에서 만날 수 있는 40~50대의 무게감 있는 중견 여배우는 그를 비롯해 극소수 뿐이다.
“배우라면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매체를 가리면 안된다고 봐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다만 드라마에서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하기엔 제가 전형적이지 않은 거 같아요. 게다가 철이 안들어서인지 여전히 낯설고 신선한 작업을 선호하다보니 제 경우 자연스럽게 연극을 먼저 택하게 됩니다.”
대학로의 든든한 기둥같은 배우지만 그도 연극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종종 있다. 지난 2014년 스타 캐스팅을 앞세운 웰메이드 상업극 ‘미스 프랑스’에 배우 김성령과 더블캐스팅 됐을 때가 대표적이다.
그는 “개막 직후 관객들이 성령 언니 공연에만 몰렸다. 일반 관객 입장에서 나는 잘 모르는 배우니까. 그때 무명 배우의 비애를 실감했다”면서 “다행히 한달 정도 지나 입소문이 나면서 내 공연에도 관객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 ‘대학살의 신’의 경우 연예인과 더블캐스팅이라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대학로에서 웰메이드 상업극의 경우 주인공으로 대중에 얼굴이 잘 알려진 연예인과 연기력 좋은 연극배우를 더블캐스팅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극배우들이 맘고생을 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 역시 심리적으로 힘든 기간을 거쳤지만 예전보다 예민함이 덜해지고 삶에 대한 깨달음들을 얻은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여배우의 40대는 빛나는 나이가 아니다. 그래도 젊음이 사라진 대신 연기력이 남는 것 같다. 또 껍데기에 속지 않게 되는 등 세상에 대한 깨달음도 얻게 된다”면서 “주름의 깊이만큼 연기력도 깊어지길 바라며 쉬지 않고 작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