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화 시위 ‘7·1 대행진’이 1일 오후 3시30분쯤부터 빅토리아 공원 잔디밭에서 열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사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홍콩을 떠난 뒤 약 2시간 만이었다. 주최 측 민간인권진선(민진)은 올해 처음으로 빅토리아 공원 축구장 사용 허가를 받지 못해 잔디밭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민진은 시민 6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시위자들은 30도가 넘는 고온과 간헐적으로 쏟아붓는 폭우를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이겨내며 행진을 이어갔다. 2014년 최대 민주화 시위인 우산혁명을 떠올리는 우산을 들거나 수건으로 땀과 빗물을 닦으면서 걸어나갔다. 시위자 대다수는 항의의 표시로 ‘민주주의 후퇴’를 뜻하는 검은색 옷을 입거나 홍콩에서 우산혁명을 뜻하는 노란색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시위 분위기는 진지했지만 엄숙하지 않았다. 출발지인 빅토리아 공원에서부터 헤네시로, 애드미럴티, 도착지 정부청사까지 곳곳에서 해학과 풍자가 넘쳤다. 시위자들은 시 주석과 전·현직 행정장관(행정수반)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촌극을 벌였다. 장관의 모형물을 주먹으로 쳐서 넘어뜨리는 행사도 열렸다. 시 주석이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노란우산을 들고 있는 합성 사진도 보였다. 시위였지만 민주화를 갈망하는 축제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시민단체와 범민주 정당은 행진이 이어지는 길목마다 부스를 설치해 모금 행사를 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시위자들은 이들의 구호를 따라 외치고 기부를 통해 지지 의사를 표출했다. 가장 많이 외친 구호로는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 즉각 석방하라”와 “렁춘잉 전 행정장관 당장 구속하라”, “민주주의 회복하라” 등이었다. 렁 전 장관은 엔지니어링 업체 UGL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의혹을 받고 있다.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같았다. 중학생 에드가 쿽(15)군과 테키 호(15)군은 홍콩의 미래가 걱정돼서 시위에 나왔다. 쿽군은 “홍콩과 중국은 교육과 경제 모두 차이가 크다”며 중국인의 대량 유입을 우려했다. 호군은 “홍콩과 중국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며 “일국양제로 20년간 홍콩 시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지핀 로(59)씨는 “중국 정부는 거짓말쟁이”라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러 나왔다”고 말했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묻자 “행정장관 선거에서 보통 선거권을 주겠다고 했는데 중간에 약속을 어겼다”고 답했다.
신이 황(18)양은 “시 주석은 홍콩이 중국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를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의 말만 듣고 시민들의 요구는 외면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제시카 찬(16)양은 “사실 행진 참가는 우리들의 책임”이라며 “앞장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노란 우산을 쓴 르노 리(60)씨는 “주권 반환 이전에 비해 경제난이 심각해졌다”고 시위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리씨는 “경제 발전을 이룩했지만 부는 일부 특권층에게만 돌아갔다”며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토로했다. 실제 지난해 11월 홍콩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539를 기록했다. 집계가 이뤄진 뒤 최대치다.
대만과 영국 국기를 들고 나온 시위자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국기를 들고 나온 시위자도 있었다. 이들은 홍콩의 완전한 독립이나 영국 식민지 시절로 복귀를 원해 대다수와는 대조를 이뤘다.
친중 단체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시위 경로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중국 오성홍기를 들고 “중국 만세, 공화당 만세”를 반복해 외치면서 시위대와 대치했다. 친중 단체와 시위대는 서로 손가락 욕설을 하고 상대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친중 단체 일부는 확성기로 괴음을 크게 틀어놓고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지 않게 방해했다. 옆에 있던 헨리 청(57)씨는 “대륙에서 건너온 고용된 시위자”라며 귀를 막았다.
시 주석은 이날 오전 홍콩 완차이의 컨벤션전시센터에서 열린 홍콩 주권 반환 20주년 행사에서 독립 세력을 향해 “중국의 주권과 안전을 해치려는 시도나 중앙 정부의 권력과 홍콩특별행정구의 기본법(헌법 격)에 대한 도전, 홍콩을 이용해 본토에 벌이는 파괴 활동은 ‘레드라인’을 넘는 것”이라며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성공적”이라고 강조했다.
캐리 람 신임 행정장관은 이날 시 주석 앞에서 홍콩에서 쓰는 광둥화 대신 중국에서 쓰는 푸퉁화로 취임 선서를 낭독했다. 람 장관은 “일국양제 시행과 기본법, 법치주의 준수, 중앙정부와 홍콩특별행정구 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선서했다. 이어 “주권과 안전, 이익에 도전하는 어떤 행동에도 법을 바탕으로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홍콩=글·사진 권준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