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중국 조선족 위해 투신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한민족 문화교류 사역에 뛰어들었다. 4선(제11~13, 15대) 국회의원 출신인 김현욱(78) 국제외교안보포럼 이사장의 의원 시절 보좌관으로 일한 것이 인연이 됐다. 국회 외무통일위원장과 교육위원장 등을 지낸 김 전 의원 등은 조선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92년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에 옌볜과학기술대학(YUST·총장 김진경) 설립을 지원했다. 김 국장은 김 전 의원과 함께 옌볜과기대를 돕다 25년이 지난 오늘까지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맡고 있다. 그동안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우리민족을 돕는 일이라 여기고 견뎠다.
“92년에 옌볜을 가는데 37시간이나 걸렸어요.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옌볜까지 밤새 기차를 탔죠. 지금이야 인천공항에서 옌볜까지 직항이 생겼지만 그때는 중국 입국조차 쉽지 않던 시절이었거든요.”
옌볜과기대는 한국교계의 바람대로 쑥쑥 성장했다. 중국 최초 중외(中外) 합작 학교법인으로 중국 내 100대 대학이 됐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한류 등으로 중국 내 인식이 급변한 덕분도 있었고, 말과 글, 한복 등 우리 문화를 지킨 조선족들의 조국 사랑 또한 힘이 됐다. 무엇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보낸 한국교계와 김진경 총장 및 교수들의 헌신이 이룬 결실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따놓고 하나님의 사명을 따르겠다며 옌볜과기대로 달려온 교수들이 수두룩하다. 교수들은 국내외 각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파송하는 방식으로 채용된다. 숙식은 학교에서 해결하지만 생활비는 파송지로부터 지원받는 월급으로 충당한다. 빠듯할 수밖에 없다.
“김 총장과 교수들의 사명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박봉에도 싫은 기색 없이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이 투영되니 학교가 발전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고향서 염전 사업하다 주님 영접
김 국장은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염전 사업을 하다 하나님을 만났다.
“저보다 17살 위인 큰형님이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제가 고려대 행정학과 68학번인데, 학교 졸업하자마자 71년에 고향으로 내려갔죠. 형수와 중학생, 초등학생 남자 조카 두 명을 돌봐야 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형님이 경영하던 염전을 대신 맡았죠.”
그러다 77년 마을에 젊은 전도사가 찾아왔다. 전도사는 남의 집 사랑방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어 1년도 안 돼 다른 곳에 기둥을 세우고 밀대방석을 깔았다. 그리고는 새 교회를 세웠으니 부흥회에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전도사는 지금 서산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강환복 목사다.
김 국장은 부흥회에서 강 전도사가 강사로 초빙한 조일원(서울 영등포제일감리교회) 목사를 만났다. 조 목사가 부흥회에서 한 ‘아브라함과 롯’의 설교가 가슴을 울렸다. 젊은 나이에 형수와 조카를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없이 세월을 보낸 자신의 처지가 롯의 상황과 절묘하게 겹쳐지면서 큰 위로가 됐다.
부흥회가 끝나고 강 전도사가 차 한 잔 하자며 붙잡았다. 조 목사는 김 국장의 무릎에 손을 얹고 ‘교회가 성장하려면 당신 같은 분이 꼭 필요하다. 교회에 일꾼이 돼주면 좋겠다’며 간곡히 부탁했다.
“외지에서 온 목사가 날 인정해주고 알아주니 우쭐해지더라고요. 마음도 흡족해지고요. 또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 설교도 좋았고요. 그래서 이튿날 또 그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었어요. 그렇게 신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토속 신앙을 따르던 모친도, 형수도 자신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가장이었던 김 국장이 변하니 자연스럽게 따라와 주었다. 조카들은 이후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를 마쳤다. 큰조카는 이후 귀국해 인천대 교수가 됐다. 작은조카는 미국 대학의 이란 분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몇 해 전 고혈압으로 숨졌다.
두 번 죽을 고비 넘기고 신앙 깊어져
90년 서울로 이사 온 뒤 자신에게 처음 복음을 전한 조 목사를 찾아갔다. 영등포제일감리교회에서 사역하던 조 목사는 김 국장을 반겼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만난 자리에서 곧바로 성도들에게 김 국장을 소개하고 교회 성도로 등록했다. 김 국장은 신앙이 더 절실했다. 협성대신학대학원 신학과를 다녀 93년 졸업했다. 그리고 영등포제일감리교회 장로가 됐다.
서울에 올라온 뒤 김 국장은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90년 겨울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몸의 오른쪽을 쓰지 못했다. 1년간 치료를 받자 마비가 풀렸다. 2000년에는 협심증을 앓아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았다.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두발로 서서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더라고요. 앞으로는 양적인 삶보다 질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제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항상 묻게 되더라고요. 나를 지우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 항상 애쓰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의 일상화를 강조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주일 교회에서만 주님을 찾지 말고 평소에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란 삶 자체라고도 했다. 삶으로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 어떤 설교나 기도보다 강력하다는 설명이었다.
“미사여구가 화려하고 힘이 넘치는 설교를 하면 뭐합니까. 삶 자체가 설교가 되면 되죠. 그리고 늘 기도가 생활화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그게 진정한 복음 아닐까요?”
신앙의 일상화를 증명하는 사례가 있다. 37년간 김 국장 곁에서 동고동락한 운전기사는 애초 종교를 갖지 않았다. 그러다 교회에 나간다고 하더니 지난해에는 장로로 취임했다.
“수 십 년을 함께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교회나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았거든요. 신앙 생활의 유익함도 알리지 않았고요. 그런데 어느새 교회를 나간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이제는 장로가 됐습니다. 그래서 장로님, 장로님하고 서로 부르죠.”
점차 줄어드는 후원, 하나 남은 고민
김 국장은 요즘 걱정거리가 있다. 옌볜과기대에서 열리는 한글 글짓기 백일장을 후원하는 일이 해를 거듭할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글 백일장은 조선족과 한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각각 5월과 10월에 한 번씩 열린다. 조선족 백일장은 1998년부터, 한족 백일장은 2006년부터 시작됐다.
애초 행사는 조선족 어린이들의 한글사랑 정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수상자들이 1주일간 한국체험학습을 다녀오고 옌볜과기대에 입학 특전을 받는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한족들 또한 백일장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해왔다.
국제교육재단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족 어린이들이 한글을 배워 상을 타고,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오게 되면 그만큼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여겼다. 그렇게 시작된 한족 백일장 또한 11년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백일장을 후원하는 기업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조선족 백일장 행사는 20년째 이어오고 있지만 매년 후원 기업이 바뀔 정도로 사정이 어렵다. 지난 5월 행사는 그나마 후원 기업을 찾지 못해 김 국장이 발로 뛰며 직접 개인 후원자들을 모았다. 올해 행사는 간신히 치렀지만 내년 조선족 백일장 행사의 후원자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한족 백일장 행사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내년 후원이 어찌될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김 국장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언제나 그랬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조선족 학생들이나 한족 학생들이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만큼 은혜로운 일이 있을까요? 파급효과가 큰 행사입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사는 꼭 이어질 수 있게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