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이 누락돼 국가로부터 평생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할머니(75)가 75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 지위를 회복했다.
전북 부안군은 지난해 8월 복지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이동복지상담' 중 주민등록이 안 된 '정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를 시작했다. 6개월간의 신원 파악 끝에 지난 3월 전남 고흥에서 정 할머니의 친척을 찾았고 현재는 이 친척으로부터 인우보증을 받아 '주민등록법'에 따른 신규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
부안군 줄포면에 살고 있는 정 할머니는 이 과정에서 한참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사연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부친은 한국전쟁 당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7살 되던 해에 2살 된 남동생까지 남겨두고 가출했다. 친가와 외가 모두 남매를 거두지 않았고 결국 둘은 고아원에 보내졌다.
할머니는 "고아원에서 '밥 짓는 것을 도우라'는 원장의 말에 잠시 일을 갔다 온 사이 남동생이 숨졌다. 그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 할머니는 식당 일을 하며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결혼을 했지만 곧 파경을 맞았고 38세 때 본처가 있던 남편 김모씨를 만나 부안 줄포면에 정착했다.
남편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 가죽공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시 부안에 내려왔다. 10여 년간 남편의 병수발을 들었고, 2007년 남편이 결국 세상을 떠난 뒤로 할머니는 줄곧 혼자였다.
정 할머니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있다 보니 지금까지 주민등록의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국가가 보장해주는 최소한의 생계지원 혜택도 모르고 있었다. 안과 치료를 받으러 갈 때는 이웃의 이름을 빌려 병원에 가곤 했다. 할머니는 "아프면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사먹었지. 지금도 냉장고에 진통제가 한가득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권리 회복을 위해 부안군 공무원들이 나섰다. 줄포면장과 직원들, 주민행복지원실 측은 할머니를 위해 온갖 행정절차를 대신 하고, 탐문활동을 벌이며 할머니의 가족관계를 밝혀냈다.
군은 법률구조공단과 함께 할머니의 '성본창설' 절차를 거친 뒤 임시 주민등록증을 회수하고 신규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계획이다. 곧바로 복지급여를 신청해 생계지원에도 나설 방침이다.
정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될 경우 월 48만원 수준의 생계지원을 받게 된다. 할머니는 "세상 모든 것에 욕심이 없다"며 "돈 쓸 데도 없다. 일부라도 주위의 어려운 이웃과 나누겠다"고 말했다.
최민우 인턴기자 cmwoo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