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은 DC코믹스 캐릭터들 중 인간의 몸으로 악과 맞서 싸우는 슈퍼히어로다. 슈퍼맨과 원더우먼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초능력자다. 배트맨의 실체인 브루스 웨인은 자본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고, 이 장비에 의존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막대하게 부를 축적한 재벌이 밤마다 악당을 직접 찾아가 싸우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허무맹랑한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 그나마 현실적이다.
1939년부터 78년 동안 이어진 이 시리즈에서 1960년대 배트맨 수트를 입었던 88세 노배우 애덤 웨스트의 11일 부고가 슈퍼맨을 연기했던 크리스토퍼 리브의 죽음(2004년 10월 10일)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전해진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초능력자인 슈퍼맨과 다르게 인간으로 설정된 배트맨은 배우의 인생을 은막 속에 가두지 않았다. 죽음은 슬프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DC코믹스 팬들은 흑백사진 속 배트맨으로 기억되는 웨스트에게 잔잔한 손짓으로 작별을 고했다.
1. 검정 수트를 입지 않았던 배트맨
웨스트는 1928년 9월 19일 미국 워싱턴주 왈라왈라에서 태어났다. 조연과 단역으로 할리우드를 전전했던 그는 1962년 제로니모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다. 할리우드스타로 올라선 ‘인생작’은 1966년 영화 배트맨이었다. 당시 배트맨은 파란색 상의에 노란색 허리띠를 차고 검은색 복면과 망토를 두른 캐릭터였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모습이었다.
미국 ABC방송은 웨스트에게 주연을 맡겨 1968년까지 2년 동안 배트맨 시리즈를 이어갔다. 방송 시리즈에서 배트맨 수트 상의는 회색으로 바뀌었다. 검은색만 사용하는 지금보다 흑백 스크린‧브라운관 속 배트맨 수트 색상이 오히려 화려했다. 파란색 상의를 입었거나 흑백사진으로 전해지는, 현세대에 다소 낯선 모습의 배트맨은 거의 대부분 웨스트가 연기한 캐릭터다. 웨스트의 배트맨은 이중적인 삶으로 내면에서 갈등하는 지금의 캐릭터보다 강직하고 전투적인 영웅의 면모가 부각됐다.
웨스트는 배트맨 TV 시리즈 120편을 소화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시리즈까지 포함하면 156편에서 배트맨을 연기했다. 그는 70, 80대 고령에도 애니메이션 성우로 할리우드에 남았다. 그렇게 70여년 동안 배우로 살았다. 2012년 미국 로스젤레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2468번째 스타로 이름을 새겼다. 백혈병 투병 끝에 이날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2. 검정 수트를 입은 배트맨
배트맨은 DC코믹스 팬들 사이에서 슈퍼맨과 함께 투톱으로 여겨지는 캐릭터다. 21세기 들어서는 배트맨의 인기가 슈퍼맨을 압도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소품 제작 및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면서 배트맨은 더 강력한 장비를 장착하고 현란하게 싸울 수 있었다. 영화 관객의 선호 역시 현실적인 영웅담 쪽으로 기울었다. 영웅담을 영화화하면서 초능력에 의존할 이유는 사라졌다.
배트맨은 1989년부터 1997년까지 팀 버튼‧조엘 슈마허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시리즈, 2005년부터 2012년까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제작한 ‘다크나이트’ 시리즈로 각색됐다.
버튼 감독의 시리즈에서 마이클 키튼은 배트맨 수트를 입었다. 조커는 잭 니콜슨, 배트맨의 연인은 킴 베이싱어였다. 후속편에서 미셸 바이퍼는 캣우먼, 대니 드비토는 펭귄을 연기했다. 버튼 감독 특유의 만화적 연출이 배트맨의 음산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시리즈다. 슈마허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가면서 분위기는 바뀌었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세기말적 광기가 시리즈 전반을 장악했다. 발 킬머는 3편에서, 조지 클루니는 4편에서 배트맨을 연기했다.
놀런 감독의 시리즈에선 악역과 조연이 주인공보다 주목을 받았다. 시리즈 첫 번째인 ‘배트맨 비긴즈’에서 리암 니슨은 악역인 듀카드, 게리 올드만은 배트맨의 협력자인 짐 고든 역을 각각 맡았다. 앞서 의인을 주로 연기했던 니슨이나 악역 전문배우로 여겨졌던 올드만 모두 이 작품에서 연기변신에 성공했다. 다크나이트 1편에선 니콜슨을 뛰어넘는 조커가 등장했다. 호주 출신 배우 히스 레저였다. 2008년 1월 사망하면서 이 작품은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 2편에서 베인 역을 맡은 톰 하디는 레저만큼 호평을 받은 악역이다.
배트맨의 충실한 집사 알프레드 역을 맡은 마이클 케인, 2편에서 캣우먼을 연상케 하는 셀리나 카일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 로빈의 등장 가능성을 암시한 존 블레이크 역의 조셉 고든레빗 역시 주목을 받은 조연들이다. 크리스찬 베일은 이 시리즈에서 배트맨과 웨인을 연기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만 집중시키지 못했다.
국민일보 더피플피디아: 흑백사진의 배트맨 애덤 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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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