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에 스웩(자기자랑, 자기과시)이 빠질 수 없고, 스웩에 돈다발이 빠질 수 없다. 하지만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이 아니다. 래퍼 솔자 보이는 뮤직비디오 소품용 지폐를 자기 돈처럼 SNS에 올려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돈에 진짜와 가짜 구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래퍼들은 이제 어느 나라 돈을 흔들어야 할지도 신경 쓴다. 미국 힙합 뮤지션들 가사에서 달러 대신 유로화나 일본 엔화, 멕시코 페소화 등 외국 화폐가 등장하는 비중이 최근 급증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에서 힙합이라는 문화가 시작된 1970년대 이후로 돈은 힙합의 핵심 주제였다. 그리고 그 돈은 곧 달러를 의미했다. 랩 가사를 모아둔 웹사이트 ‘랩지니어스’에 따르면 2007년까지만 해도 유로화와 엔화가 등장한 곡은 각각 1곡, 2곡에 불과했다. 페소화는 6곡이었다.
하지만 힙합의 영역이 세계로 넓어지고 래퍼들도 그에 따라 가사를 쓰면서, 힙합에 나오는 화폐도 다양해졌다. 지난해에는 유로화를 가사에 언급한 곡이 7곡, 엔화는 10곡, 페소화는 40곡으로 늘었다. 인도의 루피화, 러시아의 루블화, 영국 파운드화 또한 힙합 가사에 등장하는 횟수를 늘려가고 있다.
래퍼 레미 뱅크스는 ‘콜드 월드’라는 곡에서 “유로, 파운드, 엔화로 가득 찬 수영장에 깊이 다이빙한다”고 썼다. 레미 마는 지난해 히트친 ‘올 더 웨이 업’에서 “색깔 있는 돈에 대해 말하는 거야. 보라색 엔화와 푸른 디르함”이라며 아랍에미리트(UAE)의 화폐인 디르함을 까지 언급했다.
물론 외국 화폐가 힙합 곡에 등장하는 비중은 여전히 적다. 랩 지니어스에 따르면 지난해 나온 노래에 달러가 등장한 횟수는 700회에 육박했다.
하지만 크리스 스미스 남가주대 교수는 힙합 뮤지션들이 외국 화폐를 자주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재정적으로 이끌리는 지점을 표현한다고 봤다. 그는 “래퍼들은 달러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안다”며 “그들은 중국이 뜨고 있으며, 다른 경제 강국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설명했다.
해외여행과 쇼핑은 미국 래퍼들이 외환시장의 달러 약세를 의식하게 하는 요인이다. 또 많은 힙합 가수들이 해외 투어를 하면서 어떤 통화가 강세이고 약세인지 관심을 갖는다.
윌리 맥스웰은 WSJ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달러를 원하지 않아. 우리는 유로화를 원해”라는 프리스타일 랩을 선보이며, 올해 가장 가치가 많이 오른 유로화로 돈을 받길 원한다고 밝혔다.
유로화가 달러 대비 사상 최고의 강세였던 2007년, 래퍼 제이지는 싱글 앨범 ‘아메리칸 갱스터’ 뮤직비디오에서 분홍색 유로화 다발을 뽐내 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제이 페소” “유로 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달러를 선호하는 래퍼도 있다. 페티 왑은 “미국인이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달러를 제일 좋아한다”고 밝혔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