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9일 환자복 수의를 입고 등장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옷으로 보여준 것이다. 보석 허가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 아니냐는 비난 여론도 높다. 이 모습을 보고 '휠체어 출두'의 원조 격인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을 떠올리는 이도 많았다.
김기춘 전 실장은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 심리로 열린 재판에 하늘색 수의를 입고 출석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1월 말 입감한 이후 공판 출석 때마다 수의가 아닌 양복을 입었다.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수의로, 일반 수의와 다른 '환자복'이라고 한다. 병원에 입원할 때 입는 환자복과 비슷했다. 가슴에 달린 수인번호만 달랐다.
지난달 26일 심장병 등 지병을 이유로 재판부에 보석을 신청하기도 한 김기춘 실장은 이날 건강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치료 여부를 묻는 말에 "구치소에서 한 번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했다. 심장은 뛰고 있는 동안엔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언제 어느 순간 멎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 있다"고 답했다.
또 "제가 늘 사복을 입었는데 나올 때 갈아 입고, 들어갈 때 갈아 입어야 한다. 기력이 없어서 바지를 입다가 쓰러지고 너무 불편해서 오늘은 그냥 환자복 그대로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지난 1월 국회 청문회에서 "심장에 스텐트(혈관을 넓혀주는 그물망 모양 튜브) 7개를 박았다"고 밝혔다. 온라인에는 김기춘 전 실장이 환자복을 입고 재판에 나온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괜한 엄살을 피우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그의 건강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기춘 전 실장의 측근은 지난 2월 동아일보에 "심장 등 순환기 질환이 있는 환자는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한 번 문제가 생기면 응급처치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김기춘 전 실장은 '내 골든타임은 40분이다. 옥사(獄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기춘 전 실장이 '혈액 순환을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운동을 많이 하라'는 주치의 당부에 따라 독방에서 틈날 때마다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지난 2월 보도도 있다.
김기춘 전 실장이 환자복 수의와 재벌 회장의 휠체어 출두를 비교하는 이도 많았다. 특히 휠체어 출두의 원조 격인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계속 퍼졌다.
최순실씨가 받은 '구치소 청문회'의 원조이기도 한 정태수 회장은 대출비리 혐의로 구속됐고 1997년 4월 초 구치소 청문회에 나왔다. 국조위원들의 계속된 추궁에 눈을 감은 채 모르쇠로 일관했다. 국조위원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자금이라는 것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아냐"라고 소리친 일화도 유명하다.
국조위원에게 호통을 칠만큼 정정했던 정태수 회장은 청문회 20여 일 뒤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보 사건' 4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입원 중인 서울대병원을 나왔을 때 찍힌 사진은 '휠체어 출두'의 원조 격으로 지금껏 회자된다. 정태수 회장이 수의 안에 입은 환자복이 그대로 찍혔다. 오른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정태수 회장은 당시 뇌졸중으로 긴급 입원했을 때도 "실어증과 반신마비에 대한 강한 의혹이 제기된다"는 꾀병 의혹이 나왔었다. 정태수 회장은 당시 74세였다.
정태수 회장은 대출비리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그러나 2002년 말 대장암 진단을 받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07년 해외로 도피한 뒤 현재까지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지난 1월 구속됐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