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러시아 스캔들)을 놔줄 수 있기를(let it go), 마이클 플린을 놔주길 기대한다”
제임스 코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며 ‘러시아 스캔들’에 관한 수사 중단 요구를 했다고 7일 폭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충성심을 기대한다”는 말도 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대선 당시 ‘러시아와 트럼프 캠프 간에 내통이 있었다’는 의혹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된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해 수사 중단 외압이 있었다는 미 언론 보도와 일치하는 주장이다. 코미의 폭로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대통령 탄핵 사유에 해당하는 ‘사법 방해’라는 게 중론이어서 미국에서도 탄핵정국이 급속히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 '핵폭탄급' 코미 폭로
코미 전 국장은 이날 상원 정보위 청문회를 앞두고 정보위 웹사이트에 공개한 ‘모두발언문’을 통해 지난 2월 14일 백악관 회동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플린 전 보좌관에 대한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모두발언은 코미 전 국장의 요청으로 의회 증언 하루 전날 전격 공개됐다. 그는 지난달 9일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해임되기 전까지 회동 3차례와 전화통화 6차례 등 트럼프 대통령과 총 9차례 접촉했다고 밝혔다.
코미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수사 중단 요구에 대해 “그(플린)는 좋은 사람”이라고만 답했다면서 “‘이 사건을 놔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며 수사중단 요구를 거절했다고 강조했다. 코미 전 국장은 1월 첫 회동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나는 충성심이 필요하다”며 “충성심을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그 발언 이후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나는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나에게 정직함만을 보게 될 것이라고 답하자 대통령이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정직한 충성심’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코미 전 국장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미국 주요 언론은 일제히 긴급뉴스와 속보를 보도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5개월 만에 대통령직 수행에 동요를 느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 상황을 전했다. 다만 탄핵론을 드러내놓고 언급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했다.
◇ 미 언론 "디테일이 살아 있는 증언"
CNN은 ‘나는 충성심이 필요하다' 러시아 스캔들의 ‘몸통’인 플린 전 보좌관 수사에서 ‘손을 떼달라'(let go)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 파장을 예상했다.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코미의 증언이 트럼프의 대통령직을 ‘끊임없이 괴롭힐 수 있다’(could haunt)고 지적했다. 미 전국지 USA투데이는 코미의 증언에 ‘극적인 디테일'이 살아있다고 평가한 뒤 플린 수사에 대한 ’외압'(press) 부분이 큰 문제가 될 것임을 시사했다.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코미 전 국장이 상원 정보위 청문회 하루 전 공개한 ‘증언 원본'을 별도 페이지로 내걸면서 “왜 하루 전에 증언이 튀어나왔는지는 불명확하다”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성명에서 코미 전 국장은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수사대상이 아니다”라고 확인한 사실도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간의 주장도 사실로 확인된 셈이어서 ‘수사중단' 외압과는 별도의 논란이 불가피해졌다.
이와 관련해 코미 전 국장은 지난 3월 30일 전화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수사의 구름이 미국을 위해 협상하는 자신을 방해한다면서 수사를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코미 전 국장은 “FBI와 법무부가 여러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공표하기를 꺼렸다”며 “상황이 바뀌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말했다.
NYT는 코미 전 국장이 “트럼프 대통령은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확인한 증언 대목을 비중 있게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심층 분석기사를 통해 코미가 ‘트럼프는 수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확인한 부분을 그동안 일반 대중에는 왜 공개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이 증폭된 건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메모'가 폭로되면서였다. 뉴욕타임스가 16일(현지시간) 이 메모의 존재를 보도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사법방해'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이에 온라인 도박사이트 등에선 '트럼프가 탄핵될 것'이란 쪽에 돈을 거는 사람이 급증했다. 영국 도박업체는 '트럼프 탄핵' 확률을 56%로 높여 잡았다. 이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사법방해'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미국 대통령 중 탄핵 위기에 처했던 건 1974년 리처드 닉슨과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뿐이며 두 사람에게 제기된 탄핵소추 사유는 모두 사법방해였다. 법치국가에서 수사와 재판 등 법 집행에 개입하고 훼방하는 행위. 미국은 이것을 가장 용납할 수 없는 대통령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코미 메모’에 트럼프 대통령이 FBI 수사를 방해하려 했다는 정황이 담겼다고 보도했다. 코미가 이끄는 FBI가 트럼프 대선캠프와 러시아의 거래 의혹을 수사하며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까지 수사선상에 올려놓자 트럼프 대통령이 '수사 중단'을 요구했고, 메모에 그런 발언이 담겼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메모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트럼프의 행위는 사법제도가 작동하지 못하게 훼방하거나 지체시킨 사법방해에 해당한다"고 전했다.
◇ 사법방해(Obstruction of Justice)
20세기 이후 미국 대통령 중 탄핵 위기에 처했던 건 1974년 리처드 닉슨과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뿐이며 두 사람에게 제기된 탄핵소추 사유는 모두 사법방해였다. 법치국가에서 수사와 재판 등 법 집행에 개입하고 훼방하는 행위. 미국은 이것을 가장 용납할 수 없는 대통령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법방해는 중대한 탄핵 사유로 꼽힌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도 이 혐의가 적용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드러나자 FBI 수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하원 법사위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고 본회의에 상정되자 닉슨은 서둘러 하야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자신과의 성추문으로 수사를 받던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에게 위증을 교사한 것이 사법 절차를 방해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를 이유로 탄핵소추안이 발의됐고, 의회에서 부결돼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실제 탄핵당한 사람은 없다. 17대 앤드류 존슨 대통령도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됐지만 상원에선 부결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소추가 이뤄질 경우 탄핵안이 상정되는 4번째 대통령, 가결될 경우 탄핵으로 쫓겨나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된다.
미국 대통령을 탄핵하려면 하원 의원 과반수 찬성과, 상원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현재 미국 하원은 435석 중 238석, 상원은 100석 중 52석을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다.
여론도 들끓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퍼블릭 폴리시 폴링(PPP)이 지난달 성인 692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탄핵을 지지한다는 응답자가 48%,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41%로 나타났다. 여론 조사 시점은 코미 메모가 공개되기도 전이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