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말’ 허재호, 서른 즈음에 데뷔한 연기천재 [인터뷰]

입력 2017-06-06 17:09 수정 2017-06-06 17:11
매니지먼트선 제공

섬뜩한 킬러(‘나쁜 녀석들’), 능청스런 대포업자(‘38사기동대’), 속내를 알 수 없는 연예부 기자(‘미씽나인’), 우직한 의리남(‘귓속말’)….

당신의 뇌리를 스친 바로 그 얼굴. 작품마다 그가 남긴 존재감은 강렬했다. 선악(善惡)이 공존하는 얼굴로 어떤 역할이든 찰떡 같이 소화해낸다. 배우 허재호(37), 지금부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름이다.

허재호는 지난달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을 통해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극 중 잘 나가는 판사였다 궁지에 몰린 이동준(이상윤)의 곁을 지키며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노기용 역을 맡았다. 전직 조폭 출신이지만 누구보다 신의(信義)를 지킬 줄 아는 인물이다.

초반 분량은 많지 않았으나 후반 이동준과 신영주(이보영)의 도우미로 본격 나서면서 극의 한 축을 담당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만난 허재호는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좋았다. 암흑에서 빛으로 나오는 인물이란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겐 더욱 애착이 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데뷔 초 맡았던 역할들은 다소 한정적이었다. 기능적으로 쓰이는 악역이 대부분이었다. ‘작품의 폭이 점차 넓어지는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띠었다. “무거운 역을 하면 아무래도 좀 힘들어요. 실제 제 성격이랑 맞지도 않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의 스펙트럼이 없어지니까 감사할 따름이죠.”


이번 작품은 유독 현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허재호는 “이상윤 배우는 원래 팬이었는데 지금은 형·동생 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며 “성격이 너무 선해서 금세 친해졌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칭찬했다.

이보영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그는 “이보영 선배와 함께 연기를 하고 투샷으로 찍히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면서 “워낙 미인이신데 성격은 털털하시다. 사람 냄새가 나는 배우다. 가족이나 아이 등 일상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먼저 꺼내주시곤 했다”고 고마워했다.

허재호는 “나 혼자 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칭찬이라도 건넸다 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이의 공으로 돌렸다. “제 능력 이상으로 잘 봐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저는 아직 배울 게 많아요. 저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캐릭터를 잘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예요. 좋은 감독님들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아왔죠.”

이르지 않은 나이에 연기에 발을 디뎠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뿐.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하다 적성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연기학원으로 향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뉴질랜드 유학길에 올라 경영학 전공을 마치느라 시간은 좀 더 지체됐다.


그러면서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마음 한구석을 계속 간질였다. ‘어떻게든 한번 해보자’는 결심에 결국 용기를 냈다. 그렇게 출연하게 된 작품이 데뷔작 ‘열혈 장사꾼’(KBS2·2009)이었다. 이어 ‘싸인’(SBS·2011) ‘응급남녀’(tvN·2014) ‘신분을 숨겨라’(tvN·2015) 등에서 부지런히 얼굴을 비췄다.

“조바심이 많이 났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데뷔를 했으니까요. ‘내가 잘 만하면 여기저기서 불러주시겠지’ ‘역할에 맞는 준비가 아직 안됐구나’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어요. 천천히 가도 어느 순간에는 빨라지는 타이밍이 있을 거라고 믿었죠.”

지금까지 배우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가족과 친구 등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모니터도 해주고 홍보도 많이 해주고요(웃음). 그러니까 저 혼자 온 게 아니죠. 그 분들에 계셨기에 제가 지금까지 (연기를) 그만두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수식어가 붙는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허재호는 “배우”라고 간결하게 답했다. “지금은 ‘허재호가 누구야?’ 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천천히 얼굴을 익히는 게 순서라고 생각해요. ‘연기 잘하네’ 정도만 돼도 좋을 것 같아요(웃음). 어떤 역이든 잘 소화해내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