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입양이 누구에게는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고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입양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극작가 겸 단편영화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는 인숙 차펠(43)이 한국을 찾았다. 그가 쓴 희곡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가 국립극단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에서 공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은 지난 1일부터 7월 23일까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어권 한인작가 5명의 대표작을 무대에 올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을 펼친다. 한국인의 정체성 탐구라는 기획과 관련해 입양 또는 이주를 통해 해외로 나간 한국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공연이다.
지난 2일 개막해 18일까지 공연되는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는 어릴 적 헤어졌다가 25년 만에 만난 두 남매의 재회를 그린 연극이다. 2007년 영국의 신인 극작가 등용문인 ‘베리티 바게이트 어워드’를 받은 작품으로 입양과 이별, 죄책감이라는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온 남매의 고통을 파격적으로 그렸다. 영국 BBC 라디오 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다.
5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인숙 차펠은 “인종적인 조건 때문에 100% 영국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1년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입양아 초청 프로그램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절대로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외국인이라는 것과 미혼모의 자녀로서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큰 트라우마를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는 10년전 당시 내 분노, 상처 등이 녹아 있다”면서 “하지만 나중에 이 작품을 시나리오로 고치는 과정에서 이야기와 결말도 바뀌었다. 내 자신의 감정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에 영국인 남편, 딸과 함께 온 인숙 차펠은 고통과 슬픔의 터널을 통과해 편안함을 찾은 듯 했다.
그는 원래 배우를 하다 극작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30대 초반에 극작을 시작했다. 아시아계 배우로는 맡을 수 있는 배역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는 그가 두 번째로 쓴 작품으로 실제 공연으로 제작된 첫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늘 캐스팅의 장벽에 부딪혔다. 간호사, 창녀 역할만 제안이 왔다”면서 “내 커리어를 위해 직접 극작에 나섰는데,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담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교에 들어가서 극작을 공부하지는 않았다. 배우로서 연기를 해오면서 느낀 것이 극작에 도움이 됐다. 다만 작가로서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지 몰라서 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덧붙였다.
입양아로서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그는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외에도 끊임없이 한국과 관련된 작품을 써왔다. 최신작 ‘평양’은 연기 학교에서 오디션을 보다 만난 북한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단편영화 ‘꽃제비’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영국인과 영국에 사는 탈북 소녀가 우정을 쌓으며 서로에게 위안을 얻는 이야기다.
그는 “영국에서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친구가 됐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인권이 소중하다는 정치적인 소명이나 감동을 강조하는 식으로는 쓰고 싶지 않았다”면서 “영국 사람들도 감정이입 할 수 있게 북한 사람들도 정말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또 “한국에 대한 작품만 쓰는 것은 아니다. 동성 커플이 아이를 갖기 위한 과정을 그린 작품도 있다. 다만 유전자와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맥락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