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맞은 ‘한국 뮤지컬 대부’ 윤호진 “내게 은퇴란 없다”

입력 2017-06-06 12:48 수정 2017-06-06 12:53
5일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열린 고희 축하면 ‘고고80’에서 소감을 밝히는 윤호진 에이콤 대표.

“‘슬퍼하지 마세요. 영원히 쉴 때가 오니까요.’ 체홉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이 마지막 대사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쉴 때까지) 기운차게 달려가겠습니다.”

 ‘한국 뮤지컬의 대부’ 연출가 겸 프로듀서 윤호진(69) 에이콤 대표가 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열린 고희 축하연 ‘고고80’에서 소감을 밝혔다. ‘고고80’은 에이콤 직원들이 윤 대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그는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물리적인 시간을 상징적인 시간으로 바꾸자는 생각으로 살다보니 평생 바빴다.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 때문에 70살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잊어버린 것 같다”면서 “‘골골80’이 아니라 ‘고고80’으로 열심히 공연하겠다”고 말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사실 그가 없었다면 한국 뮤지컬계의 발전, 특히 창작뮤지컬은 훨씬 더뎠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고교시절 연극영화과를 지망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홍익대 정밀공학과에 들어간 그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1970년 극단 실험극장에 입단했다. 그는 “당시 (실험극장을 이끌던) 김의경 선생님이 내게 연극하다 망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보셨는데 ‘망할 게 있어야 망하죠’라고 답했던 게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극단 실험극장의 간판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82년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영국 런던에 갔다가 뮤지컬에 눈을 뜨게 됐다. 뮤지컬 ‘캣츠’를 보고 충격을 받은 그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창작뮤지컬 제작’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뮤지컬은 완전히 신세계였어요. 이거라면 손 벌리지 않고 자립할 수 있겠구나 싶었죠.”

창작뮤지컬 ‘찌질의 역사’에 출연하는 젊은 배우들이 윤호진 에이콤 대표의 칠순을 축하하는 공연을 펼치고 있다.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뮤지컬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1993년 공연제작사 에이콤을 세웠다. 같은 해 ‘스타가 될거야’로 창작뮤지컬 제작에 본격 나선 그는 1995년 한국 창작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성황후’를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2년 뒤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올랐지만 그의 삶은 끊임없이 빚을 지고 빚을 갚는 것의 연속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명성황후’ 이후 ‘겨울나그네’ ‘몽유도원도’ ‘둘리’ ‘완득이’ ‘보이첵’ ‘영웅’ 등 창작뮤지컬을 계속 발표해왔다. 이 가운데 ‘명성황후’와 ‘영웅’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때로는 번개탄을 사러 가고 싶었고 때로는 호텔 방에서 뛰어내릴까 생각이 들만큼 힘들었어요. 하지만 ‘여기가 바닥인데 더 이상은 안내려가겠지’라는 각오로 빚지고 갚고 또 빚지고를 반복하며 지금까지 자립 근사치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의 칠순 잔치에는 공연계의 내로라하는 프로듀서, 연출가, 작가, 배우 등이 200명 가깝게 몰렸다.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부부, 심재찬 대구문화재단 대표,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송승환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감독,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박민선 CJ E&M 공연사업본부장, 연출가 서재형-작가 한아름 부부, 작곡가 장소영, 배우 정동환 서인석 안재욱 정성화 강필석 김소연 등이 축하를 전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극단 미추의 손진책 대표는 “대책 없이 간덩이만 부은 윤호진의 극단적인 낙관주의가 창작뮤지컬의 발전을 이끌었다. 앞으로도 돈키호테처럼 돌진해주길 바란다”면서 “한평생 윤호진과 함께 연극의 길을 걸어서 외롭지 않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특히 정성화, 김소연 등 그와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여러 배우들이 축하 공연을 펼쳐 분위기를 북돋았다. ‘영웅’의 주인공 안중근을 연기했던 배우 정성화는 “윤 대표님이 만들어 관객들에게 바친 ‘영웅’을 오늘은 대표님께 바치고 싶다”며 ‘영웅’의 가사를 개사해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윤호진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이라고 노래했다. 또 윤 대표가 최근 제작한 창작뮤지컬 ‘찌질의 역사’에 출연하는 젊은 배우들은 뮤지컬 ‘영웅’의 오프닝 넘버를 패러디해 “칠순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100세를 기원하며”라고 노래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