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아빠다117>흑채와 장난감

입력 2017-06-06 05:01
어머니는 홈쇼핑 마니아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면서 TV 홈쇼핑 채널을 보다 이것저것 사 모으는 게 버릇이 되셨다. 지난 주말 어머니 집에 갔더니 물건 하나를 쓱 내놓으셨다. 흑채였다. 갓 마흔 넘겨 반백이 된 아들 머리가 걸리셨나 보다.
자신 머리는 백발이면서 아들 흑채를 산 게 짜증이 나서 이런 걸 왜 샀냐고 역정을 냈다. 얼마냐고 물으니 3만원밖에 안된다면서 굳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엄마 몰래 사준 장난감에 신이 난 인영이가 아빠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날, 엄마 몰래 인영이를 데리고 가서 3만원 짜리 포크레인 장난감을 사줬다. 인영이는 우와 우와~ 하며 아빠 최고를 연발했다. 같은 3만원을 썼는데 어머니는 아들한테 좋은 소리를 못 들었고, 그 아들은 딸아이한테 최고의 아빠가 됐다.
같은 3만원을 썼는데, 어머니는 아들한테 좋은 소리 못들었고, 딸아이는 아빠 최고를 외쳤다.

인영이가 아픈 이후로 제일 소홀했던 건 어머니다. 내 자식이 아프니 어머니가 부담스러웠다. 지난해 여름 어머니 칠순이었는데 인영이 핑계로 제대로 잔치도 못해드렸다. 일주일에 한번 찾아가 뵙는 걸로 아들노릇 다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사주신 흑채. 내일 출근할때 바르고 가야겠다.

내가 인영이 나이쯤, 어머니는 홍제동 고가 밑 시장에서 좌판 장사를 하셨다. 자주 따라다녔는데 배고프다고 집에 가자고 조르면 어머니는 백원 짜리를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반짝이는 동전을 가지고 시장 통을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새 해가 졌고, 어머니는 그날 팔지 못한 신발 꾸러미를 등에 지고 집에 가자고 하셨다.

내일은 흑채를 바르고 출근해야겠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